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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생각하고

<이상 소설 전집>_이상 을 읽고

by 썸머Summer 2022. 9. 23.
 
이상 소설 전집(세계문학전집 300)
한국 문단의 천재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이 남긴 모든 소설을 수록한 작품집 『이상 소설 전집』. 오늘의 독자들을 위해 엄선하여 번역한 문학 고전을 선보이는 「세계문학전집」의 300번째 책이다. 원로 국문학자 권영민 교수가 당시 문학잡지에 수록된 이상의 작품 원전을 한 자 한 자 대조하고, 이상만의 독특한 서술법을 살리되 요즘 독자들이 읽기에도 무리가 없도록 편집했다. 그 실험성과 전위성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다양한 비평 담론과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이상의 소설은 13편에 지나지 않는다. 이상은 사회 존재 기반이나 삶의 배경 없이 추상적으로만 존재하는 인물들을 통해 뿌리 뽑힌 도시인과 소외된 지식인의 억압된 충동, 감추어진 욕구를 폭로하며 그들의 무의식을 드러냈다. 그의 모더니스트적인 면모와, 시대의 예술 철학에 도전하는 천재적 재능을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저자
이상, 권영민 (책임편집)
출판
민음사
출판일
2012.11.05

이상(李箱)을 감상하는 시간



이번에도 실패다. 이번에도 나는 이상의 작품세계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영화 '금홍아 금홍아'에서 이상은 구본웅에게 말한다. '역시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법이지'라고.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지 못하는 범재일 뿐이었다. 사실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나는 신문에 실린 그의 작품을 욕했던 1930년대 조선의 독자들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2022년에도 여전히 1930년대 독자들과 결을 같이 하다니. 그의 작품 앞에서 난 패배한 듯하다.

예전에 오르세 미술관에서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봤던 기억이 났다. 당시 마네는 이 그림을 살롱전에 제출했으나 당시 프랑스 미술의 주류였던 왕립 아카데미 심사위원들에게 조롱을 당하고 낙선한다. 또 이 그림을 전시했을 때 당시의 관람객들이 크게 분노하여 우산이나 지팡이로 이 그림을 훼손하려고 해서 높이 전시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같은 미술관엔 마네의 그림뿐 아니라 당시 왕립 아카데미의 선택을 받았던 작품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네의 작품 앞에 많은 관람객이 모여있던 장면과, 마네가 낙선한 살롱전에서 큰 성공을 거뒀던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작품 앞에는 관람객들이 한산했던 장면이 대조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상의 소설들을 읽으니 대조되었던 이 장면이 떠오르면서 시대를 앞서 나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상, 그는 분명 새 시대가 오는 것을 인지하고 그 시대를 살아내려 했던 사람임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내가 대학에서 이상에 대해 배웠을 때도, 임용을 위해 공부를 할 때도 그에 대한 나의 이해는 표면에만 머무는 기분이었다. 1930년대, 천재, 자동기술법, 의식의 흐름, 모더니즘, 현대성……. 그를 수식하는 여러 가지 단어들의 나열만 외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그의 작품의 실험성, 전위성, 그리고 이를 통해 현대성을 표현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19세기의 지긋지긋한 굴레를 벗어던지고 20세기로 나아가고자 했던 발버둥이 그의 작품에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나 나는 그의 작품 전반에 흐르는 위악(偽悪)적인 태도, 비틀림, 자의식 과잉에 숨이 막혔다. 신형철 평론가가 이야기한 대로 도저한 데카당도 되지 못한 패배자의 끝나지 않는 중얼거림이 나는 듣기가 싫었다.

그의 소설 속 화자는 대부분 무기력해 보인다. 요즘 말로 하면 '폐인' 같은 자들이다. 시종 흐느적거리며 세상에 대해 통달한 듯 조소(嘲笑)를 보내지만, 어딘가 억눌려 '박제'가 되어버린 모습들이다. 그런 이들의 말은 내게는 술 취한 사람들의 그것과는 딱히 다르게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사랑과 매음을 연결지어 '예술적 삶'을 추구하겠다는 보들레르, 그리고 그의 영향을 받은 듯한 이상의 이야기도 내겐 궤변처럼 느껴졌다. 아마 시대적 한계이겠지만 그들이 말한 데카당티슴적 사랑에 여성은 영원한 객체며 타자로 등장할 뿐이다. 창부와 예술가가 영혼의 쌍둥이라니. 이런 한쪽의 시각으로만 해석된 기만적인 말이 다 있다니.

물론 성애 그 자체를 얘기하고자 한 것보다는 비틀리고 전위적인 관계를 상정해 기존의 질서를 뒤집으려는 목적이었겠지만 그럼에도 굳이 이런 수단으로? 하는 의문이 생긴다. 창부와의 뒤틀린 관계가 어째서 '현대성'의 표출이란 말인가. 이때 말하는 현대는 도대체 언제를 의미하는 건가. 우연인지 앞에서 언급한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에도 나체의 창부가 전면에 등장한다. 이런 20세기의 작품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목표를 이해는 할 수 있지만 한편, 그 수단적 한계를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이제 그동안의 현대성에 대한 논의를 뛰어넘을 또 다른 새로운 현대가 오고 있다는 의미일까.

'봉별기', '종생기', '날개'를 비롯한 이상의 소설은 시종 '위트와 패러독스'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도 어찌할 수 없었는지 위장의 가면에 균열이 생겨 그의 내면의 소리가 한 번씩 울컥울컥 터져 나왔다. 나는 회한 같기도 하면서 앞으로는 어떻게든 더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담긴 이런 목소리가 나올 때 비로소 문학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더 마음이 끌렸다. 그의 삶의 목표도 그리고 그 수단도 모두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그의 패배만큼은 공감할 수 있었다. 그 패배의 기록은 분명 절실한 진실이 담긴 가치 있는 문학이라 생각한다.

이처럼 나는 이상의 작품을 이해하는 것과 더불어 공감하는 것에도 실패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교과서에서 마주할 때마다 두려움이 앞섰다. 작품의 내용전달이나 교과서에 제시된 학습활동 정도는 가르칠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늘 마음 한구석에선 내가 이상의 작품들의 진정한 가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이 하는 얘기를 외워서 떠들어대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을 수식하는 언어들을 답습하고 싶지도 않았다. 한편 나의 편협한 시각으로 작가와 작품을 곡해하여 폄하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어 조심스럽기도 하다.

아마 앞으로 이상의 작품을 몇 번을 더 읽어도 그의 작품세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런데도 나는 그의 작품을 계속 가르쳐야 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론가와 평론가의 설명을 수용하여 그의 천재성에 대해 역설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는 이상뿐 아니라 정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을 가르쳐야 할 때 내가 종종 마주치는 상황이다. 작가의 문학사적 훌륭한 지위만 언급하고 넘어가기엔 납득하기 어려운 오욕의 행적은 나를 고민에 빠지게 한다. 또 작가뿐 아니라 작품 자체가 지닌 편파적 논리와 왜곡된 시각도 어디까지는 수용하고 어느 선부터는 현대의 시각으로 한계를 짚어내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

교사의 이런 고민의 작업을 학생들과 공유할 수 있을까. 이상의 소설을 통틀어 그의 패배 고백의 순간이 가장 마음에 와닿았었다. 그렇다면 학생들에게도 작품 앞에서 망설이고 쩔쩔매는, 패배라고 하면 패배라고 할 수 있는 교사의 이런 고민과 어려움이 함께 공유된다면 문학 수업 또한 아이들에게 더욱 가 닿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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