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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생각하고

<숨그네>_헤르타 뮐러 를 읽고

by 썸머Summer 2022. 9. 2.
숨그네(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를 읽으며 주제로 제시해주신 ‘극한의 시(時), 극한의 시(詩)’라는 표현이 끊임없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보다 더 절묘한 표현이 있을까. 신형철 평론가가 ‘시의 옷을 입은 비극’이라고 평한 것처럼 이 책은 소설이지만 극한의 시(時)를 노래한 극한의 시(詩)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이 책은 완독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분명 인물, 배경, 사건이 존재하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반복되는 배고픔, 추위, 노동, 피곤함, 권태, 향수, 이, 빈대, 죽음의 변주 속에서 책장이 지지부진하게 넘어갔다. 마치 간접적으로나마 17살 소년 레오가 겪은 5년간의 수용소 생활을 느껴보라고 하는 듯이 독자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기분이었다. 이 책과 함께 <웨이백>이라는 <숨그네>와 비슷한 시기의 수용소 생활을 다룬 영화를 감상했다. 책을 읽으며 상상했던 수용소의 생활이 영상으로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졌지만, 2시간 정도의 짧은 상영시간은 수용소의 지리하게 반복되는 고통을 담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했다.

<숨그네> 속에는 ‘참혹하다’라는 말로는 다 하기 부족할 정도의 참혹하고 끔찍한 세계가 있었다. 서술자 레오는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오히려 여행을 가는 가벼운 마음으로 수용소로 떠난다. 그러나 수용소는 인간의 존엄이 완전히 무너져내린 세상이었다. 그곳은 절대적 배고픔의 세상이었다. 배고픔은 타인과 나눌 수 없는 것이었다. 굶주림 앞에서 성별은 퇴화하고, 부부 사이의 사랑도, 인간의 존엄도 생과 사의 경계도 없었다. 단지 ‘뼈와가죽의시간’만이 있었을 뿐이다. 나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극한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 속에서 레오는 언어의, 시(詩)의 힘을 빌린다. 레오는 수용소에서 나오기 전까지 소리 내 울지 않는다. 배가 고플 때 배가 고프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고향이 그리울 때 향수(鄕愁)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수용소의 견딜 수 없는 권태와 향수와 맞서기 위해 ‘호텔’이라는 말을 이용했고, 양배추 수프의 밑바닥까지 천천히 긁어먹는 자신들을 ‘양철키스’를 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또 극한의 굶주림을 ‘배고픈 천사’라고 지칭하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착란 상태를 가슴 속에서 ‘숨그네’가 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숨그네>를 읽으면 ‘한 발 제겨 디딜 곳조차 없’는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서 ‘강철로 된 무지개’를 떠올린 육사의 시(詩) <절정>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극한의 절정에 떠올린 시(詩)적 인식에는 인간이 자신의 한계 상황을 견딜 수 있게 하는 특별한 힘이 있는 걸까.

굳이 시(詩)가 아니더라도 나는 언령(言靈)의 존재를 믿는 편이다. 말에는 분명 알 수 없는 힘이 깃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숨그네>에서 반복적으로 서술되었듯이 레오가 수용소에서 끝까지 버틸 수 있도록 해준 것은 할머니의 ‘너는 돌아올 거야’는 말이었다. ‘너는 돌아올 거야는 심장삽의 공범이 되었고, 배고픈 천사의 적수가 되었다. 돌아왔으므로 나는 말할 수 있다. 어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극한의 배고픔 속에서도 음식과 맞바꾸지 않았던 러시아인 할머니가 주신 흰색 아마포 수건을 레오는 ‘너는 돌아올 거야’라는 할머니의 말이 모습을 바꿨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수건이 수용소에서 자신을 보살펴준 단 한 사람이었다고 확신한다.

수용소에서 5년을 보낸 후 레오는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집으로 돌아가는 승차권을 손에 쥐었을 때 레오는 비로소 울부짖었다. 그렇지만 그는 아직 수용소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다. 5년의 시간은 그에게 깊은 상흔을 남겼고 거기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레오는 ‘나 거기 있었다’라는 보물이 아닌 ‘나는 거기서 나오지 못한다’고 적힌 보물을 들고 있다. 그렇지만 그래서 그는 다시 언어에 기댄다. 빈 페이지에 쓰고 다 지우고 다시 같은 말을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며 공책 세 권 분량의 글을 쓴다. 그것은 어쩌면 자기기만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용소의 모습과 극한의 시간을 표현한 <숨그네>의 예술적 언어는 서술자를 넘어 독자에게까지 힘을 발휘한다. 오히려 시각적인 영상보다도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언어를 통해 독자가 수용소에서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느끼고, 인간의 존엄을 잃게 만드는 수용소와 수용소가 아니더라도 갇힌 것과 다름없는 세계에 대해 생각하고 반성하게끔 한다. 여전히 현재성을 가지는 수용소의 세계가 ‘나 거기 있었다’로 치유되기 위해서 극한의 시(時)의 극한의 시(詩)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깊이 생각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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