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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생각하고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것

by 썸머Summer 2020. 1. 27.

 

이번 주 글감인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것’을 봤을 때 처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쓸쓸하게 터만 남아 있는 옛 유적지들의 모습이었다. 특히 어릴 적에 경주 황룡사지에 방문했을 때가 생각났다. 경주 최대의 사찰로 불국사의 8배 규모였다는, 9층 목탑이 있었다는 그곳엔 정말 터와 당시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주는 주춧돌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안 그래도 유적지니 박물관이니 재미도 없을 나이였는데 애써 찾아간 곳에서 멍하게 너른 땅만 바라봤을 때 느낀 허무함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가만히 앉아 또 어떤 것들이 사라지고 없는 걸까 생각해보았다. 여러 생각에 잠겨 창문으로 바깥을 바라보았는데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 나무를 흔든 바람들도 모두 나무를 지나친 뒤 사라지고 없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나를 지금도 지나쳐가고 있는 1분 1초의 모든 시간들이 내 앞에서 산산이 부서져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10년 전의 내가 없는 것처럼, 어제의 내가 없는 것처럼, 조금 전의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끝도 없이 외롭고 허무해졌다. 손안의 모래알들이 속수무책으로 빠져나가듯 결국 내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았다. 

이런 생각이 들던 차에 최근 읽고 있는 책인 ‘코스모스’에서 재미있는 구절을 읽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은 지구에서 몇 광년, 심지어는 몇만 광년도 더 떨어져 있고 그렇기에 지금 내 눈앞에서 빛나는 별의 모습은 최소 몇 년 전에서 몇만 년 전의 모습이라는 이야기였다. 반대로 생각하면 사라졌다고 여긴 10년 전의 내가 10광년 떨어진 별에서는 지금 존재한다는 이야기 아닌가. 기분이 묘해졌다. 시간이라는 것은 순간순간 사라져 없어진다고 여겼는데 광활한 우주 속에는 아득한 과거, 얼마 전의 과거, 현재가 공존한다고 하니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나무를 흔들고 지나간 바람. 바람은 나무를 지나쳐 사라지고 없어진 것 같지만 나뭇잎이 떨어지거나 나뭇가지의 방향이 미세하게 바뀌거나 하는 바람의 흔적은 남았다. 불타버린 황룡사도 주춧돌과 터만은 약 1000년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를 지나쳐간 모든 시간, 그 속에서 내가 했던 무수한 행동과 선택들은 모두 누덕누덕 내게 흔적을 남겨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끔 한다. 광활한 우주 속에서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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