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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생각하고

뜨거운 여성 연대의 이야기 -<체공녀 강주룡>을 읽고

by 썸머Summer 2020. 2. 11.

 

 

 

강주룡,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엔 한 번도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강주룡은 일제 강점기 여성 노동자이자 노동 운동가이며 한국 노동운동 역사상 최초의 여성 고공 농성자라고 한다. 역사교육에서 모든 역사를 다룰 수는 없으니 그중 주목받는 역사와 주목받지 못해 잊힌 역사가 있다면, 일제 강점기의 노동운동 역사와 그와 더불어 여성 노동가 강주룡의 역사는 주목받지 못한 쪽이다. 이 책은 이렇게 잊혀가는 역사를 기반으로 서술된 소설이다. 

일제 강점기를 살아간 사람들이라고 하면 일제의 모진 핍박 속에 고통받는 평범한 조선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는 어쩌면 남성에게만 해당하는 얼굴일 것이다. 이 소설의 이야기를 따르면 이 시대의 여성들은 일제의 핍박과 동시에 심각한 가부장제의 굴레 속에서 이중 삼중의 고통 속에 처해있었다.

특히 서로를 ‘동지’라 칭하는 독립군 속에서조차 주룡은 진짜 동지가 아니었다는 점이 화가 많이 났다. 독립군이 되겠다고 찾아왔지만, 주룡에게 주어진 일은 자연히 밥 짓기와 빨래 등의 일뿐이었다. 주룡이 큰 활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한 주룡에 대한 대장의 신임마저 부적절한 남녀관계로 치부하여 희롱하기 일쑤였다. 일제에 항거하는 바른 뜻을 가지고 모였다는 이들 속에서도 여성은 동등한 존재가 될 수 없었다. 이 부분을 읽으니 최근 몇 년 사이에 수차례 불거진 소위 ‘진보진영’ 속에서 일어난 여성차별, 성희롱, 성폭행 등의 사건들이 떠올랐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모인 그들의 여성에 대한 인식은 일제 강점기 주룡의 ‘동지’들과 많이 달라졌을까? 

주룡이 공장을 다니며 만난 여공들의 사연은 너무 흔해서 클리셰로 여겨질 정도이다. 그리 썩 나쁜 형편은 아니지만, 남동생 두 명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어린 나이부터 공장에 다녀야 하는 옥이, 아이를 못 가진다고 시댁과 남편에게 학대를 받다 힘들게 아이를 가지고 낳았지만, 출산휴가 따위는 없어서 출산하자마자 바로 젖먹이를 데리고 공장으로 출근해야 하는 삼녀. 한 번쯤은 들어봄 직한 이야기들. 그만큼 내 앞 세대의 할머니, 어머니, 이모가 너무나 당연하게 감내해온 삶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여성의 연대가 두드러진다. 주룡이 시집가는 날 주룡의 발에 딱 맞는 신발을 선물해주며 주룡과 부둥켜안으며 펑펑 울던 어머니, 주룡과 언니 동생처럼 때론 엄마와 딸처럼 정을 나누는 옥이, 그리고 공장의 부당한 처우에 맞서 함께 힘을 모으는 여공들까지. 세상은 그들에게 억압의 굴레를 거듭 씌우지만 이에 맞서 여성들은 끊임없이 함께 힘을 모으고 또 모은다. 

오랜만에 여성 작가가 쓴 힘 있는 여성 서사를 만나 읽는 내내 정말 즐거웠다. 지금까지 한국역사에서, 한국 문학사에서 여성들은 너무 그늘 속에 가려져 있었다. 카프 문학이니 노동소설이니 하는 데서 여성에 대해 제대로 다룬 것이 얼마나 되는가. (그나마 높은 성취를 거둔 것이 강경애의 <인간 문제> 정도려나) 섬유, 의류, 신발 등 경공업을 바탕으로 산업 발전을 이룩했다는 역사는 가르치지만, 그 경공업 분야에 종사한 수많은 여공의 이야기는 어디로 갔을까. 전태일 열사는 모두가 알지만, 그보다 앞서 일어난 강화도 심도직물 여공들의 투쟁은 그만큼 많이 알려져 있나.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 문학에서 여성 작가들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던 것 같다. ‘여류작가’라고 남성 작가와 구분해서 지칭하거나 여성들의 문학은 섬세하고 사변적이라는 식으로 뭉뚱그려 이야기하는 사람도 많았다. 예전에 모 작가님과 독자들의 대화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어떤 남성 독자가 작가님의 문체와 ‘신경숙’ 작가의 섬세한 문체가 닮은 것 같다는 감상평을 얘기했다. 물론 감상은 개인적이지만 내가 느끼기에 그 작가님과 신경숙 작가와의 공통점은 정말 ‘여성’이라는 것뿐이었다. 지레짐작일 수 있지만, 작가님도 살짝 언짢은 듯했다. 그래서 내가 작가님 글에서 신경숙 작가는 잘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레이먼드 카버’가 느껴졌다고 얘기했더니 작가님은 자신이 소설 공부를 할 때 그의 책을 많이 읽었다고 아마 영향이 없진 않을 것 같다고 답해주셨다. 

그러나 현재 한국 문학에서 여성 작가들은 두드러진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맨부커 상의 한강 작가를 비롯해 국내의 유명 문학상을 언제부턴가 여성 작가들이 대다수 수상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동안 묵인되어온 문학상의 파행에 대해 용기 있는 목소리를 낸 작가들도 여성 작가들이다. 여성 작가의 이야기, 여성 작가가 들려주는 여성의 이야기, 그리고 현실 세계에서까지 이어지는 여성들의 연대.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들기엔 아직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체공녀 강주룡>과 같은 이야기가 앞으로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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