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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생각하고

<양의 미래>_황정은 를 읽고.

by 썸머Summer 2022. 8. 30.

태양의 미래


아무도 아닌
황정은의 세 번째 소설집 『아무도 아닌』. 《파씨의 입문》이후 4년여 만에 펴내는 소설집으로, 2012년 봄부터 2015년 가을까지 발표한 여덟 편의 단편소설을 묶었다. 2014년 이효석문학상 수상작 《누가》, 2014년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 《상류엔 맹금류》, 2013년 젊은작가상 수상작 《上行》이 수록되어 있다. 어쩔 수 없는 이 세계의 시민이자 작가로서 황정은이 그 시간을 정직하게 통과해오면서 놓지 않았던 고민의 흔적과 결과들을 특유의 낭비 없이 정확하고 새긴 듯 단정한 문장들로 담아냈다. 이 책에 담긴 여덟 편의 작품을 한데 모아 읽는 일은 단순히 훌륭한 예술작품을 경험하는 것을 넘어, 지금 이 순간 바로 인간이라는 삶의 자리에 독자인 자신을 다시금 위치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저자
황정은
출판
문학동네
출판일
2016.11.30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할 때 대체 '양의 미래'가 무슨 뜻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 다. '양'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단어인데 한자 표기가 함께 되어 있 지 않아서 정확히 어떤 의미로 사용된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순하고 가축으로도 기르는 동물 '羊'을 뜻하는지, '아가씨'라고 불리던 '나'를 지칭하는 'ᄋᄋ양'인지 아 니면 밝음을 뜻하는 '陽'인지 이 모든 것이 아닌 또 다른 의미인지 아리송했다. 그러나 소설을 다 읽고 난 뒤 나는 이 소설의 제목을 '陽의 미래'라고 이해하고 싶어 졌다.

'나'는 햇빛이 가장 좋은 순간에도 지하층 서점에서 일하고 햄버거 체인점, 패밀리 레스토랑, 도서대여점, 마트 모퉁이 등을 전전하는, 분명 존재하지만 잘 보이지 않는 존재이다. 마치 그림자 속에 있는 듯 '음(陰)'의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나'처 럼 그늘(陰) 속에 사는 다른 직원들과 '호재'도 일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훌쩍 떠나버리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타인들과 끈끈하게 얽혀있지 않고 이 사회 속에서 가볍게 부유하는 듯하다. '나'도 '호재'도 진지한 관계나 아이를 낳고 기르는 등의 책임감이 요구되는 일은 거부한다. 그리고 관계를 끝내는 그 순간에도 유난스러운 파열의 소란을 겪기보다 그저 상대를 내버려 둔 채 가버리는 방법을 택한다. 주어진 것을 묵묵하게 감내하다 못 견딜 때가 되면 훌쩍 사라지는 그런 삶. 그들이 떠난 자리는 분명 조금은 허전하지만 없어져도 딱히 큰 영향은 없어 보인다.

이렇게 한 번도 중요한 인물이었던 적이 없던 '나'는 순식간에 모두에게 중요한 인물이 된다. 갑자기 '보호가 필요한 소녀를 보호해주지 않은 어른', '비정한 목격자 '가 되어 모두가 '나'에게 '그때 무얼 하고 있었냐'고 묻는다. 그러나 반대로 '나'에 게 물어야 할 것은 '무얼 하지 않았나'다. '나'는 그저 늘 그랬듯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뿐이다. 분명 소녀와 남자들의 관계가 일반적이지 않다고 느꼈으면서도 그들의 관계에 대해 캐묻거나 신고를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에게도 변명의 여지는 있다. 그렇게 사사건건 모든 일에 참견할 만큼 한가하지도 않았기에 자신이 무슨 판단을 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는 변명. 그리고 변명을 하는 것 이상으로,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데 나는 왜 그 '아무'를 신경 써야 하는지에 대한 분노까지 치밀어 오른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자꾸 지하창고에서는 바람이 불어온다. 마치 왜 그때 소녀를 도와주지 않았냐고 묻는 것처럼. 서점 앞에 버티고 앉아있는 소녀의 어머니를 향해 나는 어쩔 수 없었다고 힘껏 변명하며 화를 내보려 하지만 결국 마음속 분노의 언어는 전하지 못한 채 '나'는 또 떠나버린다. 하지만 이번엔 이상하게 신발 때문인지 자꾸 정강이가 당기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나'는 그 이후에도 여전히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채로 부유하듯 살아가지만 대신 가끔 밤을 새워서 소녀의 소식을 찾아다닌다. 비록 '나'가 소녀의 간절한 손길을 잡아주지는 못했지만 '나'의 내면의 작은 양 심은 자꾸 '나'의 발길을 붙잡는다. 외부에서 바라보면 도움의 손길을 뿌리치는 행동이 무책임하고 비정해 보이므로 '그때 당신은 도대체 무얼 했는가, 왜 행동하지 않았는가'하고 쉽게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간절하게 내민 손길을 잡아주지 않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 이다. 단지 잠깐 성가시고 애매하다는 이유로 넘겼을 뿐이다. 지금도 깨닫지 못한 사이에 간절한 손길을 뿌리치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곳에는 '陽의 미래'가 없다.'호재' 역시 '나'처럼 아무리 볕이 잘 드는 날에도 음지에서 일하는 사람이지만 그는 길가를 전전하던 고양이들에게 '시루, 인절, 콩'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새끼고 양이의 체온이 돌아오도록 따뜻한 무릎을 내어주고, 고양이들이 비와 직사광선을 피할 수 있도록 우산을 얹어주었다. '호재'의 돌봄 덕분에 죽을 뻔한 고양이들은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고 적어도 이 고양이들에게만큼은 '호재'는 보이지 않는 음지의 존재가 아닌 태양처럼 빛나는 존재일 것이다.


이처럼 비록 미약하지만, 살짝 내민 손길의 끝에 '陽의 미래'가 있다. '나'는 끝 내 바람이 불어오는 벽 너머를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딸을 잃은 어머니에게 끝 끝내 억울함과 분노를 쏟아내지 않았던 작은 친절, 소녀를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에 소녀의 소식을 찾아 헤매는 수많은 밤들이 '나'를 '陰의 현재'에서 '陽의 미래'로 나 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언젠가 ‘나’가 바람 이 불어오는 벽 저편으로 넘어갈 때 비로소 '陽의 미래'가 올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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