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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밤의 꿈같은

집에서 집으로. 입국한 날의 기록

by 썸머Summer 2020. 3. 30.

정말 최종의_최종의_최종. 모든 것이 마지막이었던 날이었다. 임신을 확인한 이후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남편이 룸서비스로 가져다 줬던 아침 메뉴(지_브렉퍼스트, 지브레!)도 마지막이고 귀중한 김치를 아낌없이 투자한 김치찌개가 버밍엄에서의 마지막 식사 메뉴가 되었다. 

밥을 먹고 히드로 공항으로 출발할 때까지 시간이 남아 남편이랑 ‘놀면 뭐하니’의 ‘방구석콘서트’ 2편을 함께 봤다. 사실 저번 주에 1편을 함께 보면서 2편은 이제 따로 봐야겠네…….하고 살짝 눈물을 훔쳤는데 다행히(?) 2편도 함께 볼 수 있어서 괜히 기분이 좋았다.

영국 도착해서 운동할 때 신으려고 인터넷으로 샀던, 생각보다 발볼이 너무 넓은, 그렇지만 모양은 못생겨도 정말 편해서 신나게 신고 다녔던 ‘왕발이 신발’과도 안녕, 93호 대문과도 안녕, 진짜 Farewell Hemisphere! 하고 나니 1년 7개월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히드로 공항까지 가는데 날씨도 너무 좋고, 거의 locked down 상태라 그런지 도로에 차도 거의 다니지 않아서 정말 드라이브하기에 끝내주는 날이었다. 겨우 익숙해진 영국의 풍경들도 이젠 정말 안녕이라는 생각과 당분간 남편과 떨어져 지낼 생각을 하니 계속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진짜 가는 날에는 울기 싫어서 천인공노할 범죄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눈물을 참았다. 길이 하나도 안 막혀서 공항에 너무 일찍 도착할 것 같아 중간에 휴게소에 잠시 들러 집에서 싸온 우리의 ‘오후 베이글 타임’을 마지막으로 가진 뒤, 히드로 공항에 드디어 도착했다. 

공항은 살벌한 분위기였다. 나도 철저히 준비했지만 다들 마스크를 쓰고 비닐장갑을 끼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방호복을 입고 고글을 쓴 중국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그런데 정말 동양 사람들은 한사람도 빠짐없이 마스크를 철저히 끼고 있는데 오히려 서양인 항공사 직원들은 아무도 마스크를 끼지도 않고 심지어 자기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얘기까지 하던데, 지금 이렇게 큰 히드로 공항에서 Boots랑 WHSmith 말고는 다 문 닫힌 것 안 보이냐고. 사람들이 이렇게 방호복까지 입고 다니는 것이 안보이냐고. 이렇게 해서 언제쯤 코로나바이러스를 극복하려고 이러는지 남편을 두고 먼저 가는 입장에서 그런 안일한 모습을 지켜보는 내가 다 답답했다.

남편을 두고 혼자 출국장에 들어가는데 남편이 잘가라고 손을 흔드는 모습이 자꾸 눈에 밟히고 왜 이렇게 눈물이 나던지. 나 남편을 너무 사랑하나봐. 엉엉. 게다가 나중에 기내에서 책을 읽으려고 꺼냈는데 책 사이에 남편이 손 편지를 나 몰래 넣어둬서 그걸 읽으니 또 눈물이 퐁퐁 솟았다. 남편도 나를 정말 사랑하나봐. 엉엉

 

조금 흔들렸지만 마지막 야경! 

 

대한항공 비즈니스 석은, 아니 어떤 항공이라도 비즈니스 석은 전부 처음 타봤는데 이렇게까지 편하고 좋을 줄은 몰랐다. 돈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편하게 살고 있구나 싶었다. 일단 수하물을 부치는 줄도 따로 서니까 수하물 부치는 데에 1분도 안 걸리고, 시큐리티 검사도 따로 패스트 트랙이 있는지 몰랐는데 그것까지 따로 하니 시간도 적게 걸리고 공항에서 사람들이랑 많이 접촉할까 걱정했는데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게이트도 먼저 열려서 일찍 비행기에 착석할 수 있었고, 막 재킷도 받아주고 웰컴 드링크와 스낵을 주고 저녁과 아침식사 메뉴도 미리 주문을 받아가는 식이라 황송 그 자체였다.  라이언에어(일명 개이언개어) 타며 느꼈던 서러움이여 안녕ㅋㅋ 게다가 다행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렇게 배치한 건지 내 옆자리도 공석이라 당연히 먹을 때 빼곤 마스크는 절대 안 벗었지만 그래도 한결 걱정을 덜 하면서 올 수 있었다. 그치만 한편 승무원분들은 비행 내내 마스크를 쓰고 서비스를 제공하려니 얼마나 고생스러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기내식도 너무 맛있는 게 잔뜩 나와서 도저히 안 먹을 수가 없었다. 나는 저녁식사로 스테이크와 비빔밥 중 비빔밥을 주문했다.(먹알못) 난 당연히 비빔밥만 나오는 줄 알고 마스크 벗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헐레벌떡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는데 디저트까지 나온다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치즈크래커에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이어서 욕심 부려 먹느라 배가 터지는 줄 알았다. 

식사를 마치고 잠을 청해보는데 잠이 오는 듯 안와서 뒤척뒤척하다 잠이 들었다. 그래도 완전히 쭉 뻗고 누울 수 있어서 그런지 9시 쯤 잠을 청했는데 아침 먹으라고 승무원분이 깨워주실 때 시간을 보니 새벽 4시쯤으로 비행기에서 잔 것 치곤 꽤 오래 잤다. 잠을 오래 자고 일어났더니 벌써 한국에 거의 도착할 시간이었다. 배도 덜 당기고 아가도 뱃속에서 잘 노는 것 같아서 생각보다 정말 편하게 올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국이닷 +_+

 

거의 인천에 다 도착해서 착륙을 준비한다고 창문을 열었는데, 오랜만에 보는 한반도의 풍경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한국의 하늘 높이, 구름 모양, 하늘 색깔, 바다 색깔, 산과 밭의 모양, 한국식 도로와 주택의 모습……. 이제야 내가 비로소 영국을 떠났다는 게 실감이 났다. 여기가 내가 태어나서 쭉 살아왔던 그 풍경이구나 싶어서, 이젠 영국에 다시 돌아갈 때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한국이 반가운 동시에 정든 곳을 등졌을 때의 서러움 같은 것이 동시에 밀려왔다. 

한국이다. LTE의 나라답게 이륙이 조금 지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상시간보다 50분이나 빨리 도착했다. 미리 영국에서부터 자가 격리 어플을 다운받아 온데다 증상도 딱히 없어서 어플 인증과 검역, 한국 연락처 확인까지 일사천리로 슝 통과했다. 오기 전 많이 읽어둔 다양한 입국 후기가 도움이 됐다. 캐리어 하나가 안보여서 조금 당황했지만 그것도 직원분의 도움으로 잘 찾아 입국장 바깥으로 나오니 오후 2시 25분쯤이었다. (원래 비행기 착륙 예정 시간이 2시 50분) 

입국장을 나가자마자 보건 관련 직원 분들이 많이 계셨다. 직원분이 지방으로 대중교통을 타고 가는 사람들은 따로 모아서 간다고 안내를 하시는데 내가 그걸 잘못 알아듣고 오늘부터는 자차로도 아예 이동이 안 된다고 하시는 줄 알고 잠시 눈앞이 캄캄해졌다. 엄마 아빠가 차를 몰고 애써 인천까지 왔는데(우리 집에서 인천까지 차로 약 5시간 거리) 오늘부터 정책이 또 바뀌어서 엄마아빠만 괜히 고생시킨 거면 어떡하지 싶었는데 다행히 나의 바보 같은 실수! 

내가 생각보다 너무 빨리 나오는 바람에 오히려 엄마아빠를 기다리느라 공항에 앉아 있으면서 직원 분들이 일하시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게 되었다. 정말 한국 의료진과 보건 관련 모든 직원 분들이 몸을 갈아가며 일한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이렇게 일요일인데도 나와 일하고 계시는 모습을 직접 보니 너무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평소에 나는 사람을 갈아 넣어야 돌아가는 시스템을 정말 싫어했고 사실 지금도 그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비상사태 속에서는 이런 시스템이 빛을 발한다는 게 참……정말 카뮈의 <페스트>에서 묵묵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본분을 다 하며 봉사했던 리외, 타루, 그랑 같은 인물들이 떠오르면서 위기는 이렇게 조금씩 희생하면서 이겨낼 수 있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와 의무, 개인과 공동체의 개념과 그 관계는 실로 어렵고도 복잡한 것 같다. 부디 노력하고 계신 모든 분들이 건강하시길!

중간에 엄마아빠만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것을 제외하고는 휴게소에도 들르지 않고 왔는데도 익숙한 거리가 나타날 때쯤엔 어느새 늦은 저녁이었다. 영국으로 떠날 때와 달리 새 친구와 함께 돌아왔다. 집을 떠나 다시 집으로. 한 이야기가 끝나고 또 새로운 이야기가 쓰일 이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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