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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밤의 꿈같은

나의 아지트 Costa Coffee

by 썸머Summer 2020. 3. 17.

나는 공부도, 업무도, 취미 생활도 카페에서 하는 것을 좋아하고 한 번 카페에 앉으면 두세 시간은 거뜬히 혼자 보낼 수 있는 소위 ‘카페 죽순이’다. 그래서 영국에 도착한 뒤에 곧바로 내가 즐겁게 시간을 보낼 만한 적당한 카페를 열심히 찾아다녔다. 

그리고 내 조건과 완벽하게 부합하는 이상적인 카페를 발견했다. 그곳이 바로 대학교 내 체육관에 있는 ‘Costa Coffee’였다. 우선 안 그래도 대중교통비가 비싼데 카페에 다닌다고 매일 교통비를 쓸 수 없으므로 내가 자주 가는 카페는 걸어서 갈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우리는 대학교와 나름 가까운 곳에 집을 얻었기 때문에 이곳은 충분히 걸어 다닐 수 있었다. 게다가 체육관에 있으니 카페에 가는 겸에 운동까지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또 나는 카페에서 주로 책을 읽거나 업무를 하므로 좌석 배치나 의자와 탁자의 모양이 꽤 중요하다. 책상이 너무 낮거나 주로 대화하는 사람 위주로 자리가 배치되어있으면 꽤 불편한데, 이곳은 학생들이 대다수 이용하다 보니 1인 좌석도 많았고 책상의 높이도 적당해서 학생들도 이곳에서 많이들 과제를 하거나 공부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난 카페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개인이 운영하는 조그만 카페에 그렇게 오래 앉아있으려면 괜히 눈치가 보이는데 코스타 커피는 영국에서 스타벅스만큼(어쩌면 스타벅스보다 더?) 흔한 체인 카페라 눈치 보지 않고 실컷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장실. 나처럼 카페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많이 공감할 것이다. 보내는 시간만큼 화장실 사용도 거의 필수이기 때문에 이 점도 꽤 중요한 조건인데 이곳은 이런 점까지 아주 만족스러웠다. 

나는 아메리카노, 카페라테, 카푸치노, 플랫화이트를 자주 마셨다. 코스타 커피의 카페라테는 스팀 우유를 많이 넣어서 커피 맛보다 우유 맛이 더 강해 약간 심심한 맛이다. 한국의 쫀쫀한 맛의 카페라테는 오히려 플랫화이트를 주문했을 때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카푸치노는 어차피 카페라테, 플랫화이트와 재료가 같으니 맛은 비슷하지만, 더 부드럽고 코스타 커피에서는 시나몬 대신 초코 파우더를 뿌려줘서 달콤함을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얼어 죽어도 아이스아메리카노’라는 한국인답게 가장 많이 마신 음료는 아이스아메리카노였다. 유럽의 카페는 가끔 아이스아메리카노 메뉴가 없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체인 카페답게 그 메뉴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과 비교해서, 또는 당장 영국의 스타벅스와 비교해도 코스타 커피의 아이스아메리카노는 꽤 밍밍하다. 음료에 들어가는 얼음의 양이 적어서 차가움과 미지근함의 중간쯤 위치한 음료에 휴지 심 같은 종이 빨대가 꽂혀 나온다. 체육관에서 강도 높은 운동을 한 뒤, 벌게진 얼굴을 한 채 마시는 아이스아메리카노는 얼마나 맛있는지!

영국에선 아메리카노를 시키면 대부분 우유를 넣어줄지 묻는다. 나는 그럴 때마다 늘 괜찮다고 사양했는데 내가 얼마나 자주 갔던지 나중엔 바리스타가 “너는 아메리카노에 우유 안 넣지?”하고 나의 취향까지 파악해 쑥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 바리스타와는 그걸 계기로 친해져서 우리 엄마가 영국에 놀러 왔을 때 엄마를 소개해 주기도 하고 내가 머리를 잘랐을 때도 바로 알아봐 주는 등 나름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 같다.

이곳에서 나는 주로 책을 많이 읽었다. 그래도 영국에 왔다고 원서를 읽고 싶어서 더듬더듬 읽어 나갔고 책을 읽다 보니 내 어휘력이 많이 부족한 것 같아서 읽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단어장에 빼곡히 정리했다. 볕이 좋은 날엔 엄마랑 통화하며 영국의 풍경을 보여드렸다. 여행을 다녀와서 느낀 점을 남기고 싶어서 나름대로 여행기를 작성했고, 참석하지 못하는 친구의 결혼식 축사도 썼다. 미처 다 마무리 짓지 못한 생활기록부를 쓸 때는 여기까지 와서 내가 뭘 하는 건가 싶어 헛웃음이 나오기도 했지만.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만큼 함께한 사람들도 많았다. 학교의 빵빵한 와이파이를 빌려 네이버 밴드에 사진을 올리느라 낑낑대던 엄마, 카페가 문 닫는 늦은 시간에 모여 아이슬란드 여행을 계획을 함께 짠 지인들, 이상한 계기로 친해져서 책도 빌리는 사이가 되었으나 약간 yellow fever 느낌이 나서 멀리했던 미국인까지 돌이켜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 순간들이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더욱 이곳, 체육관 안의 Costa Coffee를 추억할 것 같다. 잊지 못하고 그리워할 것 같다. 이 공간 자체를, 만났던 사람들을, 이곳에서 보낸 모든 시간을, 창밖으로 보이던 풍경을, 테이블 위에 비치던 햇볕을, 얼음이 녹으며 컵에 맺힌 물방울을, 흐물흐물해진 종이 빨대의 맛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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