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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밤의 꿈같은

한국으로 돌아가기까지 D-8

by 썸머Summer 2020. 3. 20.

올해 7월까지 예정되어있던 나의 영국 생활이 임신과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많이 앞당겨져서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기까지 일주일 정도가 남았다. 

어제 오후까지는 런던 봉쇄와 관련된 소문이 돌고, FT나 가디언즈에서도 그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하길래 혹여나 원하는 날짜에 못 나갈까 하는 걱정에 온 신경이 쓰였었다. 그런데 어제 오후 총리가 기자회견을 하며 일단은 런던을 봉쇄할 가능성은 0이라고 하니(워낙 매일 휙휙 바뀌는 정세 속에 이 말 또한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원하는 날짜에 나갈 수는 있겠다 싶어서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렇지만 내가 자꾸만 네이버 카페나 소셜미디어를 들락거리며 코로나 소식만 주야장천 보고 있으니, 보다 못한 남편이 내게 이제 영국에서 지낼 날도 정말 얼마 안 남았는데 남은 기간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이나 챙겨가야 할 것에 대해 차분히 생각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그래서 재작년 영국에 오기 전 내 나름대로 해보고 싶은 것들을 다이어리에 적어놓은 것을 다시 펼쳐 보았다. 

1. 독서나 음악감상 같은 사소한 일도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하기
2. 너른 천 한 자락 공원에 펼쳐놓고 누워 낮잠 자기
3. 취미 관련 수업 듣기 
4. 블로그 활동 꾸준히 하기
5. Pub 문화 즐기기
6. V&A 박물관, 내셔널 갤러리, 테이트모던 가기 
7. 런던에서 뮤지컬 감상하기 –라이언 킹, 빌리 엘리엇
8.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 가기
9. 채스워스 하우스_ 오만과 편견 촬영지 가보기 

라고 적어 뒀던데, 버킷리스트 자체가 워낙 소소하기도 해서 그런지 거의 다 이룬 것 같아서 그나마 마음의 위안이 된다. 

우선 1번은 임신 전엔 거의 매일 했었다. 그렇지만 영국을 떠나기 전 내 영혼의 아지트 체육관 내 코스타 커피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들르고 싶었는데 오늘 체육관을 닫는다는 공지가 떠서 너무 아쉽다. (정말 코로나19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다. 휴) 

2번은 낮잠까진 아니지만, 공원이나 잔디밭에 돗자리를 펼쳐놓고 앉아보았는데 예상보다 많은 작은 개미들의 침범에 식겁하고 나는 그렇게 자연 친화적인 사람은 아니라는 깨달음만 얻었다. 

3번은 어학 수업, GX, 바이올린 등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안 해서 그렇지 나름 하고 싶은 것은 다 해보았으니 통과! 

4번, 블로그 활동. 이게 좀 아쉽다. 원래는 이곳의 일상을 정말 요모조모 다 기록해서 훗날에도 두고두고 꺼내 읽으려고 했는데 팽팽 놀기만 하다가 최근에서야 조금 꾸준히 글을 쓰게 되었다. 지나 가버린 날들이여! 

5번 Pub 문화 즐기기. 영국에 오기 전 읽었던 많은 영국 생활기에는 펍이 아주 매력적인 공간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나도 그 문화를 즐기고 싶었다. 그렇지만 막상 몇 번 가보았더니 내겐 딱히 그리 매력적이진 않았다. 우선 동네 펍은 나이 드신 분들도 많고, 술집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많이 나서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런던 템스강 변 멋진 펍에 가도 안주 없이 그저 맥주만 들이켜는 이 문화에 끝내 적응하지 못했다. 맥주라도 맛있으면 좋으련만 영국은 맥주까지 내 입맛에 안 맞았다. 난 청량함, 시원함을 추구하는 편인데 영국의 대부분 맥주는 뭔가 미지근하고 밍밍한 맛이 난다.

6번은 런던에 살지 않은 것 치고는 꽤 런던에 자주 놀러 가서 여러 차례 다녀왔었는데 잘한 것 같다. 물론 런더너처럼 정말 회원권 끊어서 기획 전시도 보고 V&A 정원에서 한가롭게 시간도 보내면서 더 자주 다니고 싶었지만.

7번 중에서 ‘빌리 엘리엇’를 못 본 것은 아쉽다. 역시 언제든 보러 갈 수 있다고 미뤄서는 안 됐다. 엉엉. 그래도 부모님들이 오셨을 때 ‘레미제라블’, ‘라이언 킹’을 관람했으니 그것으로 아쉬움을 달래본다. 

8번 9번은 결국 하지 못한 채 영국을 떠나게 되었다. 작년에 글래스턴베리를 가려고 했는데 내 예상보다 표가 너무 잘 팔려서 내가 표를 구매하러 갔을 때는 이미 전부 매진. 그리고 사실 이제 20대 초반도 아닌데 며칠간의 록 페스티벌을 잘 즐길 수 있을지 겁도 나서 더 적극적으로 추진하진 않았었다. 올해는 50주년을 기념해 폴 매카트니가 라인업에 있고 테일러 스위프트도 온다고 하길래 난 못가더라도 남편이라도 가라고 했지만, 이 또한 코로나바이러스로 취소. 9번이 지금 생각하면 제일 아쉽다. 우리 집에서 1시간 반밖에 안 걸리는 거리에 있어서 한 번쯤 다녀와 볼 만했는데…. 마지막으로 가볼까 했더니 여기도 임시휴업 중이더라. 역시 ‘지금 바로 즉시’가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다음에’ 하고 미루다간 영원히 못 하게 되는 것들이 많은 것 같다. 


그래도 나름 잘 즐겼다. 특히 며칠 전 영국에서 새로 샀던 원서들을 한데 모아 사진을 찍었는데 다 읽지 못했음에도 쌓여있는 책이 괜히 뿌듯했다. 물론 내 목표에는 한참 못 미쳤지만. 한국에 돌아가서도 원서는 꾸준히 읽으면서 조금이나마 가지게 된 영어의 감(?)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비교군에 따라 영국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 아쉬움과 후회마저 내 모습인 것을 어떻게 하겠어. 부디 한국에 돌아갔을 때 그제야 ‘~할걸’의 리스트가 길어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럼 남은 날 동안 내가 하고 싶은 것, 그중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남았을까. 솔직히 집 밖을 나가기가 무서운 요즘, 뭘 할 만한 것이 남지 않은 것 같다.
Stoke-on-Trent 그릇 아웃렛에 가서 예쁜 찻잔 세트를 사 오고 싶지만, 그것도 좀 망설여지고. 찰리의 초콜릿 공장의 모티프가 되었다는 이 지역의 명물 Cadbury 초콜릿 공장 견학 또한 불가능. 그렇지만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내가 좋아했던 공간들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방문하고 싶은 것인데 그것조차 녹록지 않으니. 

결국, 집에서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 가족과 친구들을 위한 선물 하나를 제대로 사 가지도 못한 채 돌아가게 될 것 같다. 남은 시간 동안 사 놓고 다 못 읽은 원서나 열심히 읽고, 또 다른 긴 여정이 될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차분하게 정리해야겠다. 

이 글을 쓰고 언젠가 한 번은 사먹어야지 하고 벼르고만 있었던 Five guys의 햄버거를 주문했다. 이것까지 미루기는 싫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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