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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___Diary

임신을 처음 확인한 날 이야기

by 썸머Summer 2020. 1. 15.

 

 

 

오늘의 나는 13주 6일차의 임산부이다. 임신 초기에 있었던 많은 일들과 그때 느꼈던 생각들을 그동안은 입덧 때문에 정리하지 못해서 대신 오늘부터 차분하게 글로 써 내려가려 한다. 

먼저 오늘은 임신을 처음 확인했던 그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날은 우리의 결혼기념일이었고 그날을 기념하기 위해 남편과 함께 런던에 당일치기로 놀러갔었다. 그동안 런던에 많이 놀러갔지만 그동안 하지 않았던 것들을 하자는 마음으로 마담투소의 밀랍박물관도 놀러 가보고, 처음으로 런던아이에 타서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템스강변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런던수족관을 구경하며 뜻밖의 횟감, 참돔과 숭어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또 남이 해준 한식이 더 그리워서 굳이 한식당에 찾아가 집에서 해먹기 어려운 감자탕에 치즈불닭을 시켜 먹으며 행복하게 서로 기념일을 축하했다. 

그러던 와중에 생리를 할 날짜가 조금 지난 것 같다는 얘기가 나왔다. 정확한 주기는 아니어서 1주일 정도 차이가 있긴 했지만 약 10일 정도 늦어진 생리 소식에 남편과 나는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고 충동적으로 Boots에 가서 임신테스트기를 구입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기차를 기다리던 카페 화장실에서 테스트를 해봤다. 결과는 두 줄! 그런데 두 줄은 두 줄인데 뭔가 미묘하게 한 줄은 희미한 것이 아닌가. 인터넷을 찾아보니 그런 경우엔 임신이 아닐 수도 있다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바로 해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했다. 차라리 집에 가서 해 볼 것을. 남편도 나도 간절히 기다리던 소식이라 임신이 맞는지 아닌지 괜히 불안하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홍수로 인해 원래 내가 타야했던 Northwestern rail이 취소되었다고 전광판에 뜨는 것이 아닌가. (아니 근데 여긴 비가 한국만큼 폭우가 쏟아지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자주 홍수 피해가 생기는 건지) 하지만 다행히 Virgin train을 대신 이용할 수 있다고 안내를 받았다. Virgin train이 대체로 Northwestern보다 좌석도 편하고 더 빨라서 이런게 전화위복인가 싶었다.

그러나 평소 기차로 약 10분이면 갈 거리인 주변공항 역과 내가 내릴 역 사이에서 갑자기 기차가 정차한 채 꼼짝을 안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공항 역에서 목요일 밤을(어째서 목요일에?) 거하게 즐긴 한 무리의 취객들이 쉴 새 없이 큰소리로 웃고 떠들고 급기야 노래까지 소리 높여 불렀다. 영국의 토토가 느낌으로 브리트니스피어스와 크리스티나아길레라의 노래들을 엄청나게 불러대는데 정말 말 그대로 미칠 것 같았다.

폐쇄된 장소, 10분이면 갈 거리를 1시간가량 정차해 있는 기차, 취한 사람들의 소음과 냄새, 하루 종일 사용해 거의 밑바닥을 보이는 핸드폰 배터리까지 모든 것이 스트레스 상황이었다. 신사의 나라 영국? 이미 그런 이미지는 사라진지 오래긴 했지만 공공예절에 대한 의식이 이렇게까지 밑바닥일 줄은 몰랐다.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사람으로서 너무 참기가 힘들었다. 나는 외국인이고 인종차별을 당할 수도 있으니 멀쩡한 영국인 승객이 제발 ‘어이 거기 자네들 적당히 하라구’라고 말해주길 바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정말 임신이 맞는다면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될 텐데 하는 불안감까지 가중되어서 지옥의 시간을 보냈다. 결국 예상 도착시간보다 기차는 약 2시간 정도 늦게 도착했다. 한꺼번에 승객들이 우르르 쏟아지고 비가 내리고 있어서 그런지 평소엔 턱턱 잡히던 우버도 잡히지 않았고, 택시를 타려고 밖에 나가니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어마어마했다. 결국 힘들게 기다려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했고 택시기사에게 카드로 결제를 하려면 타기 전에 미리 말했어야한다는 듣기 싫은 소리까지 마지막으로 들으며(한국은 택시 카드결제가 기본값이라고!) 다사다난한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너무 피곤하면 정말 혹시나 찾아왔던 아이가 떠나갈까 겁나 얼른 침대로 쏙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내가 우리 아이의 첫 존재를 어렴풋하게나마 확인했던 것은 이런 날이었다. 다양한 감정이 어떤 날보다 부글부글 들끓었던 그런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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