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여름밤의 꿈같은 18

이제는 꿈에서 깨어날 시간 한국으로 돌아가는 편도 항공권을 끊었다. 원래 내가 영국에 머물 수 있었던 기간은 2018년 9월부터 2020년 7월까지였다. 그러나 출산일도 7월이라 출산일에 가깝게 비행기를 타는 것에 대한 부담 때문에 예정 날짜보다 약 2개월 빨리 돌아가는 표를 구매했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갈수록 나빠지기만 하는 유럽의 상황과 영국 총리가 얼마 전 발표한 herd immunity(집단 면역) 전략에 대한 걱정, 이곳에서는 제대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불안함에 귀국 날짜를 한 달이나 훌쩍 앞당겨 3월 말에 돌아가게 되었다. 영국에 가는 것이 결정되고 떠날 준비를 하는 그 시간 동안 얼마나 설렜는지 모른다. 6년 차에 접어든 직장생활에 슬슬 지쳐갈 무렵 영국으로 훌쩍 떠난다는 사실은 나를 얼마나.. 2020. 3. 16.
싸움의 기술 그런 날이 있다. 뭔가 손발이 척척 맞아 떨어지지 않는 날.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그동안 영국의 의료 체제 속에서 고군분투해 왔지만, 그래도 이젠 나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임신 25주에 Midwife(이하 MW)와 만나는 예약을 하기 위해 GP에 전화를 걸 때만해도 내게 벌어질 일을 예상하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오늘 내 전화를 받은 접수원은 감기에 걸려 코맹맹이 소리를 내었고, 나는 이상하게도 평소보다 더 상대방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저번에 MW를 만났을 때 다음 예약은 3월 25일로 하라고 했기에, 나는 3월 25일에 예약을 할 수 있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날은 예약할 수 없었다. 여기서부터 균열이 생긴 것 같다. 접수원은 내게 MW가 수요일에만 GP에 온다고 다음 주로 예약하.. 2020. 2. 19.
로맨스가 필요해 며칠 전이 밸런타인데이라 남편과 함께 애프터눈티를 즐기고 왔다. ‘영국’ 하면 유명한 것 중 하나가 애프터눈티라서 영국에 오기 전부터 한 번쯤은 해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언제든지 마음을 먹으면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아직 하지 못했었다. 그렇지만 이제 곧 한국으로 돌아갈 때도 되었고 밸런타인데이를 로맨틱하게 보내고 싶어 지인이 추천해 준 곳으로 예약을 했다. 예전에 홍콩 페닌슐라 호텔에서 애프터눈티를 먹었을 땐 3단 트레이에 샌드위치, 스콘 및 달콤한 디저트들이 담겨 나왔는데 이곳은 코스요리처럼 나오는 것이 특이했다. 드라이아이스로 기분 좋은 효과를 낸 코코넛 크림 브륄레를 시작으로 2단 트레이에 예쁘게 올려진 한입 크기의 샌드위치, 마카롱, 밀푀유, 타르트 등이 각자의 .. 2020. 2. 17.
스크린 속 나의 오빠들 나는 내 인생의 시간 대부분을 어떤 ‘오빠’의 팬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보냈다. 나의 사적, 사회적 정체성은 다양한 학년 군의 학생에서 직장인으로 이리저리 바뀌었지만 어떤 ‘오빠’의 팬이라는 정체성은 변함이 없었다. 물론 여기서 ‘오빠’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바뀌었다. 지금은 ‘생물학적’으로 오빠인 경우에서 잘생긴 사람에게 부여된다는 ‘사회적 지위’로서의 오빠로 바뀌긴 했지만, 누군가를 응원하는 서포터즈, 팬, 덕후, 빠순이인 나 자신은 그대로였다. 이상하게 나는 그렇게 많은 오빠를 갈아 치우면서도 배우나 솔로 가수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오직 그룹으로 활동하는 아이돌들만이 스크린 속 나의 오빠가 되었다. 아이돌을 좋아하는 것이 내겐 습관이자 관성이자 라이프스타일이 되어버려서 그런지 가족, 친구,.. 2020. 2. 13.
캐논힐 파크 우리 집 옆에는 아주 멋진 공원이 있다. 한국으로 단 한 공간을 떼어 갈 수 있다면 이 공원을 떼어 가고 싶을 정도로 맘에 드는 공간이다. 처음 영국에 도착했을 때,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도 힘들고 내가 상상했던 풍경과는 조금 달라 한두 달간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때 이 공원이 내게 많은 위안이 되어줬다. 우리 집에서 걸어서 약 3분쯤 걸리려나. 정말 말 그대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어서 어느 날 어느 시간이든지 갈 수 있다. 게다가 꽤 오래된 공원인지 나무들도 정말 크고 울창해서 공원보다는 숲길을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계절마다 바뀌는 공원의 풍경은 또 어찌나 아름다운지. 봄에는 분홍 꽃이 피고 여름에는 일광욕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이 잔디밭에 풀썩 누워 뒹굴뒹굴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2020. 2. 3.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에 대한 생각 전염병은 공포다. 우리 주변에 늘 존재하지만, 그 존재를 잊고 살던 우리에게 죽음을 상기시키는 공포다. 게다가 아직 백신마저 찾지 못했다고 하면 죽음의 그림자가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공포다. 다른 어떤 것도 아니고 그냥 학교에 가고 일터에 가고 사람들을 만났을 뿐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타액을 통해, 공기를 통해 죽음의 신의 칼날이 나를 향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 없이 두렵다. 내가 기억하는 범위 내에서도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여러 번의 신종 전염병의 유행이 있었다.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 그런데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와 그 전의 병은 내게 느낌이 아주 다르다. 그동안은 그냥 손 잘 씻고, 마스크 철저히 쓰는 등으로 개인위생에만 철저하면 뭐 큰일이 있겠냐 싶었다. 워낙 언론에서 떠들어대니.. 2020. 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