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신과 코로나 19 때문에 정말 거의 몇 달간 거의 집 안에만 있다가 이번 주에 쫓기듯 한국으로 돌아가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남편이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한 곳이라도 여행을 다녀오자는 제안을 했다.
테네리페에 다녀오고 크게 데였기 때문에 내심 걱정되기도 했지만, 당일치기 드라이브 일정으로는 다녀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기 위해 차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차 안에서 먹을 유부초밥도 싸고 오며 가며 마실 아이스커피도 미리 내려서 냉동실에 얼려두었다. 쓰고 갈 마스크와 손 세정제에 알코올 스프레이까지 준비 완료!
그런데 갑자기 여행 전날 저녁, 총리가 중대한 발표를 했고 그 내용은 거의 외출금지령에 가까웠다. 모든 가게가 다 문을 닫는 것은 물론이고 그냥 두 사람보다 많이는 서로 어울려서도 안 되며 만약 어길 시엔 공권력을 투입하거나 벌금을 물게 하겠다는 강한 조치였다. 혹시 내일 여행을 갔다가 단속을 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차에서 정말 한 발자국도 안 나가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일단은 출발했다.
스노우도니아 국립 공원은 웨일스 지방에 있는 국립 공원으로 1년 6개월 동안 Britain 섬에서 살았지만 웨일스를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웨일스 지역에 들어서자마자 곳곳에 웨일스 지역 국기가 나부끼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도로 표지판에 영어와 함께 정말 생소한 웨일스의 언어가 병기된 것이 정말 신기했다. 예를 들면 도로에 “SLOW”라는 말과 함께 반드시 “ARAF”라는 말도 함께 적혀있는 식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성이 굉장히 볼만했을 ‘콘위’라는 마을에 도착해 차에 탄 채로 마을을 한 바퀴 돌아봤는데 정말 모든 가게가 다 닫혀있고 길거리엔 마트에 다녀오는 듯한 사람 한두 명만 보일 뿐이었다. 어차피 차에서 나갈 생각도 없었지만 정말 길거리를 다녀서는 안 되는 그런 분위기였다. 뭔가 영어마을(?) 이런 세트장 같은 곳에 들어온 듯한 느낌도 들었다. 집들을 두드리면 딱딱하지 않고 속이 빈 스티로폼의 ‘퉁퉁’ 하고 울리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근처에 항구가 있길래 그곳에 차를 주차하고 준비해 간 도시락을 먹었다. 아쉽지만 창문만 내려도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바닷소리도 잘 들리고 자유롭게 활보하는 갈매기들도 실컷 구경할 수 있어서 소풍 나온 기분이 물씬 들었다.
그러고는 국립 공원을 쭉 둘러보는 드라이브 코스를 달렸다. 정말 안 왔으면 아쉬웠을 정도로 웨일스는 웨일스만의 색깔이 뚜렷한 풍경을 가지고 있었다.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빨간 머리 앤을 재밌게 봤는데 그 드라마를 여기서 바로 찍어도 될 정도로 전원적인 그 시절의 풍경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존 컨스터블의 그림 그 자체 같이 느껴졌다. 이렇게 목가적인 초원 풍경이 펼쳐지다가도 갑자기 돌연 장엄한 협곡이 나타난다. 깎아 지르는 돌산과 강한 바람을 이겨내고 자란 들풀, 그리고 펼쳐진 초원 속에 눈부신 강이 흘러가는 풍경은 지금까지 내가 잉글랜드에서 본 풍경들과는 또 다른 감동을 주었다.
그리고 정말 ‘Welsh Lamb’이라는 그 명성에 걸맞게 양들이 정말 많았다. 사람은 정말 10명도 못 본 것 같은데 양은 못 해도 천 마리는 넘게 보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많았다. 특히 드문드문 보이는 새끼 양들이 정말 귀여웠다. 어미 양들은 누렁누렁해졌는데 새끼 양은 때를 덜 타서 그런지 아직 하얗고 막 엄마 곁에서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모습이 귀여워 탄성이 절로 나왔다. 우리 아가의 첫 번째 인형은 오늘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게 아가 양 인형을 사줄까 싶다.
초봄이라 이제 새순이 막 돋아나기 시작했는지 아직은 물감으로 칠한 선명한 초록빛 세상이기보다는 파스텔이나 색연필로 채색한 듯한 부드러운 연둣빛 세상이었다. 남편과 이런 풍경을 바라보며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서 삶이 팍팍하다 느껴질 땐 우리 이 평화로운 장면을 떠올리자는 얘기를 나눴다.
거의 왕복으로 6시간 동안 차만 실컷 탔던 당일치기 여행이지만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영국의 풍경을 내 눈에 가득가득 담아 올 수 있어서 좋았다. 몇 달간 셀프 자가격리하다가 이런 시기에 먼저 귀국하는 나를 위해 기꺼이 오랜 시간 운전해 준 남편에게도 정말 고마웠다.
오늘 드라이브를 하는 내내 계속 노래를 들으며 다녔다. 우리가 그동안 여행을 다니면서 그때그때 꽂혔던 노래들이 있었는데 그 노래들을 다시 들으니 영국에 온 이후로 다녔던 여행들의 기억과 감정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과 어울렸던 이문세의 <그녀의 웃음소리뿐>, 부모님과 여행을 다니며 들었던 잔나비의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콘월 여행의 추억이 남아 있는 Gavin James 의 <Nervous>와 Jimmy Fontana의 <Il Mondo>, 그란카나리아의 태양과 잘 어울렸던 악동뮤지션과 위너의 노래들. 노래만 들어도 여기에 이번 웨일스 여행에서 새로 추가된 장범준의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 향이 느껴진 거야> 와 이적의 <순례자>까지. 아마 또 시간이 지나 이 두 노래를 들으면 오늘의 웨일스가 아련히 생각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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