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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이의 눈으로 보는 세상

EXODUS

by 썸머Summer 2020. 2. 29.

 

전날의 모래폭풍이 잠잠해지길 바랐던 나의 기도를 하늘이 들어준 것인지 다행히 다음날 날씨가 다시 맑아졌다. 그러나 여행을 올 때와 마찬가지로 내일도 먼 길을 가야 한다는 생각이 은근히 스트레스가 된 것인지 배가 또 딱딱하게 뭉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체크아웃하기 전날 저녁부터 체크아웃하는 시간까지 방 침대에 꼼짝하지 않고 누워만 있었다.

 

누워서 인터넷으로 신문기사나 넘겨 보던 그때, 속보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있는 테네리페섬에서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가 발생했고 그 확진자가 머물던 호텔 투숙객 수백 명이 전부 그 호텔에 그대로 꼼짝없이 격리당했다는 뉴스였다. 정말 내 눈을 의심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여긴 정말 유럽 대륙이랑도 꽤 떨어진 작은 섬인데, 스페인은 내가 여행을 올 때만해도 확진자가 1명이었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게다가 확진자가 묵었다는 그 호텔은 불과 내가 투숙한 호텔에서 2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가까운 곳이었다. 또 이름이 익숙해서 찾아보니까 숙박할 호텔을 선정할 때 우리도 후보에 넣었던 호텔이었다. 만약 내가 이 호텔에 숙박했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하니 머리가 아찔해졌다.

 

원래는 비행기 이륙시간이 오후 5시라 12시에 체크아웃을 하고 널찍한 소파가 있는 호텔 로비의 카페에서 충분히 누워 있다가 공항으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체크아웃을 하고 소파에 누워 있는데 경찰관과 보건당국 직원으로 추측되는 사람들이 우리 호텔의 로비에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이 호텔도 곧 폐쇄되어서 집에 못 가는 것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얼른 호텔을 나와 택시를 잡고 일단 무작정 공항으로 향했다.

 

그러나 비행기 이륙시간보다 약 4시간 일찍 도착한 공항도 혼돈 그 자체였다. 모래폭풍 때문에 출발이 지연되었던 비행기들이 전부 이날 이륙하기로 한 건지 공항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모든 게이트 앞에는 앉을 자리가 없어서 사람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게다가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까지 발생했다는 데도 마스크를 쓰고 있는 사람은 나와 몇 명의 사람들뿐이었다.

 

도저히 그곳에서는 대기할 수 없어서 VIP 라운지에 들어가 배가 뭉치지 않도록 누울 수 있는 곳에 최대한 누워 있었다. 하지만 앞 시간부터 모든 비행기가 연착되더니 내가 탈 비행기도 탑승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게이트 정보조차 계속 뜨지 않았다. 배는 자꾸 딱딱해지는 것 같지, 언제 출발할 수 있을지 아무런 정보도 없지, 게다가 코로나바이러스까지 불안함과 초조함에 내 숨통이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결과적으로 3시간 정도 연착되었지만 그래도 호텔에 격리되지도 않았고, 비행기가 무사히 이륙해 우리 집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하늘이 도왔다는 생각이 든다. (나중에 기사를 찾아보니 우리와 비슷한 시간에 출발한 다른 비행기는 결국 영국까지 가지 못하고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본토로 우회해 다음 날 저녁까지 또 지연되었다고 한다.)

 

무사히 도착하니 영국의 축축하고 시린 이 날씨가, 흐리고 우울한 이 경치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지금은 며칠째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 아직 불안함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다. 괜히 목도 아픈 것 같고 마른기침도 나는 것 같아서 무섭고, 아가한테도 너무 미안하다. 부모님도 그냥 취소하는 게 어떻냐고 했던 여행이었는데 괜히 내 욕심에 무리하게 가서 이런 고생을 하고 온 것 같다. 그러니 부디 아무런 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다. 아무 일이 없어야 훗날 그때 엄마가 태교 여행 갔다가 아주 대 탈출 영화를 찍었어~’ 라고 즐겁게 얘기할 수 있을 텐데. 모래폭풍부터 섬 탈출 이야기까지 모든 것이 해프닝이고 재밌는 추억이 되기를 지금은 간절히 또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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