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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이의 눈으로 보는 세상

여행을 떠나요

by 썸머Summer 2020. 2. 29.

해외에서 거주하는 경험이 내 인생에 다신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임신을 확인하기 전까지 거의 한 달에 한 번은 여행을 다녔다. 남편과, 엄마와, 때론 혼자서 영국의 각 지역과 유럽의 다양한 나라들을 다녀왔지만 임신 사실을 알고 난 뒤엔 임신초기의 위험과 입덧 등으로  12월 러시아 여행, 1월 뉴욕 여행을 미련 없이 취소했다. 

심지어 우리 지역엔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어 있을 만큼 중국인들도 많이 살고 있어서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걱정으로 시내에도 잘 나가지 못해 요즘엔 내가 살고 있는 동네 바깥으로도 안 나가고 칩거생활을 해오고 있었다. 그래서 임신 전부터 미리 예약했던 2월 스페인 섬 여행만큼은 정말 취소하고 싶지 않았다. 

10월쯤에 가을이 끝이 나면서 지금까지 길고 지루한 영국의 겨울이 이어져왔다. 영국, 특히 우리 동네의 겨울은 정말 지리멸렬함 그 자체이다. 일단 한국처럼 혹한의 추위는 아니지만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바람은 뼈마디가 시리게 만든다. 또 그나마 겨울 무드를 한껏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눈이 내리는 것도 아니라 그저 흐린 날씨, 비, 찬바람만이 몇 달간 지속될 뿐이다. 그리고 한여름엔 밤 9시가 넘어야 겨우 해가 지던 것과 대조적으로 오후 4시 반이면 사방이 어둑어둑해지는 것도 너무 싫다. 

그래서 따사롭게, 가끔은 뜨거울 정도로 내리쬐는 햇볕과 청명한 파란 하늘과 온화하게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이 너무 그리웠다. 

가장 최근 초음파 검사 때 내 태반이 살짝 아래에 있다던 말, 스페인 본토에서도 한참 더 남쪽으로 가야하는 생각보다 긴 비행시간, 전 세계적 문제가 된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공항과 기내에서의 상황에 대한 걱정까지 몇 번이나 여행을 취소해야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밝은 자연광 아래에서 임신 사진도 예쁘게 찍고 싶고 맛있는 스페인 음식도 잔뜩 먹고 싶고 무엇보다 정말 따뜻한 햇살을 온몸에 받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에 결국 이곳, 테네리페에 도착했다. 

최근 컨디션이 정말 괜찮았는데 여행 전날 갑자기 배가 딱딱해지고 막 땡기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 잠이 드는 그 순간까지 그냥 취소를 할까 말까의 고민을 반복했지만 다행히 아가가 잘 도와줘서 무사히 호텔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얼마 전, 한 육아 예능에서 어떤 아이가 태교여행을 한 장소가 다 기억난다고, 뱃속에서 다 봤다며 귀엽게 얘기하는 걸 들었다. (진짜일까? 아니면 상상력이 좋은 아이인걸까?) 나도 이번 여행을 ‘태교여행’이라고 하고 싶지만  더 컸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모행여행’이라고 붙여볼까. 엄마의 행복을 위한 여행. 우리 아가가 이 장소를 기억하지 못해도, 지금 내가 느끼는 따뜻한 태양 아래서 행복한 이 기분을 함께 느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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