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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이의 눈으로 보는 세상

리스본행 새벽열차를 타고 리스본으로

by 썸머Summer 2023. 7. 9.

리스본행 야간열차 대신 포르투에서 출발하는 리스본행 새벽열차를 탔다.

언제나 느낌적인 느낌 만큼은 살리고 싶어하는 나. 그래서 여행 오기 전에 다 읽고 싶었지만 미처 다 읽지 못한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마저 읽으며 리스본으로 향했다. 그러나 새벽부터 일어나 리스본으로 떠날 준비를 하느라 피곤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고 그 사이에 기차는 곧 리스본 산타 아폴로니아역에 도착했다.

역을 나가자마자 바다 같은 테주강이 바로 역 옆에 가까이 있어서 리스본의 첫인상이 반갑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나의 여정은 다 끝난 것이 아니었고 사실 진짜 고생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숙소의 호스트가 “Lisbon is not flat.”이라는 메시지를 보냈을 때, 살짝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7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졌다는 리스본답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언덕길과 울퉁불퉁한 돌길에 숙소에 도착하기 전부터 벌써 하루의 에너지를 다 쓴 기분이었다.

내가 머물 숙소는 트램이 언덕 꼭대기로 올라가는 길 중간쯤에 있는 현지인이 사는 집이었다. 공간을 타인과 공유하는게 익숙하지 않아 언제나 아파트를 통째로 빌리는데 이번에 예약 과정에서 숙소 설명을 제대로 읽지 않고 실수를 해서 아파트 한 채가 아니라 현지인이 실제로 거주하고 있는 집의 한 방을 빌려버렸다. 현지인과 함께 공간을 공유하는 것도 처음인데 알고 보니 호스트가 게이 커플! "모던패밀리"의 미첼과 캠 커플이 위층에 세를 주는 에피소드가 생각나기도 했다. 어쨌든 호스트분들은 굉장히 친절하셨고 밤에는 그들의 친구가 놀러 와 조용히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다가 함께 차를 마시기도 했다. 여행은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경험을 안겨주기 때문에 재미있는 것 같다.

리스본 여행을 리스본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광장이라는 '코메르시우 광장'에서부터 시작했다. 이곳은 리스본 대지진이라는 대재앙을 겪고 그 상처를 극복했던 포르투갈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있는 공간이다. 그래서인지 테주강과 당당하게 마주 보고 있는 개선문에선 설령 시련 앞에서 또 무너지더라도 다시 일어나겠다는 포르투갈 사람들의 강한 의지가 느껴지기도 했다. 여름이었다면 온화한 바람이 불어왔겠지만 12월의 바람은 기온이 따뜻한 편인 포르투갈일지라도 꽤 사나웠다. 이러한 사나운 바람을 헤치고 길을 따라 도착한 곳은 ‘타임아웃마켓’. 이곳에서 점심을 해결한 뒤 다리가 너무 아픈 관계로 호시우 광장까지는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지하철 타는 곳의 표식이 요트 모양이어서 순간 지하철이 아닌 배를 타는 곳인가 싶어 헷갈렸다. 나중에 알아봤더니 우리나라 지하철은 숫자로 호선을 구별하듯 리스본은 색으로 구별하고 각 색깔의 선마다 상징 그림이 있었다. 내가 호시우 광장까지 타고 간 지하철은 verde. 즉 초록 선. 초록 선의 상징 그림은 돗배. 나머지로 빨간 선, 노란 선, 파란 선이 있었고 각각 나침반(동쪽), 해바라기, 갈매기의 상징 그림이 있고 그 그림이 곧 노선명이라고도 한다. 그냥 숫자로 명명하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다고 생각했고 사소한 부분이지만 도시가 더 생동감 있게 느껴졌다. 그래서 만약 서울 지하철에도 이런 그림 체계가 있으면 어떤 상징 그림을 부여할 수 있을까 상상해보았다. 1호선은 가장 오래된 선이고 종로 같은 구시가를 지나가니까 태극 모양의 태극선, 2호선은 학생들이 가고 싶어하는 대학교들을 많이 지나가니까 책 그림으로 책 선이면 어떨까.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선이 4개뿐인 리스본엔 걸맞겠지만 9호선+a 의 복잡한 지하철 체계를 가진 수도권 지하철에 도입하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이런 상상을 하다보니 금세 호시우광장에 도착했다.

호시우 광장은 특유의 파도 치는 무늬의 바닥과 분수대가 어우러져 경쾌한 인상을 주었다. 근처 학생들인지 소풍을 나온 것인지 청소년들이 그냥 삼삼오오 바닥에 앉아 있는데 참 자유로워 보였다. 그렇지만 길바닥에 아무렇게 앉거나 눕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이 사람들의 위생에 대한 관념을 솔직히 아직은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호시우 광장을 지나 피게이라 광장 앞에서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가 있는 곳까지 가기 위해 노란색 트램을 탔다. 트램 운전사분의 화끈한 성격 때문인 것인지 리스본의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탓인지 주차해 놓은 트럭 운전사분과 격한 말싸움을 벌이셨지만 트램에 타고 있는 승객들이 모두 발걸음이 바쁘지 않은 관광객들이라 그들의 싸움을 희극의 한 장면을 감상하는 사람들처럼 유쾌하게 바라보았다. 역시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인 것일까.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에 오르니 테주강과 함께 어우러지는 주황빛 지붕의 오래된 집들의 아름다운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펼쳐진 도시의 모습이 마치 바다를 동경하는 깃발 같았다. 예전의 뱃사람들이 항해를 나갔다가 돌아올 때 이 주황색의 지붕들이 보이는 그 순간 얼마나 기뻤을까.

또 이곳은 예능 비긴어게인2에서 거리공연을 한 장소이기도 하다. 포르투갈 여행을 오기 전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알아볼 겸 그 방송을 보고 와서 그런지 TV에서 봤던 눈에 익은 장소가 나타나서 신기하면서, 그 프로그램에서 가수들이 부른 노래들을 이어폰으로 들었더니 눈앞에 버스킹하는 모습이 펼쳐지는 것 같아 그 공간이 한층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에서 조금 자리를 옮겨 조금 더 조용하다는 그라사 전망대 쪽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길에 골목길에 있는 노천카페에 몇 사람이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들 담배를 피우며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생각에 잠겨있었는데 담배 냄새라면 질색하는 나지만 왠지 그때만큼은 나도 담배 한 개비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용한 그 특유의 분위기가 좋았다.

 

비록 담배는 피우지 않았지만 나도 그라사 전망대에 있는 노천카페에 앉아 이 도시에서 느낀 감정들과 생각들을 가만히 글로 써 내려가 보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전망대에서 언덕 아래 광장으로 내려가는 골목길에서 만난 담벼락에, 벤치에, 대성당에 가만가만 어둠이 내려앉고 골목 사이사이를 다니는 트램이 찌릉찌릉 종을 울리며 오늘 하루도 고단하게 보냈을 사람들에게 평안함을 선사하는 듯했다.

숙소가 포르타스 두솔 전망대 근처라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그곳에 다시 한번 들렀다. 왠지 피렌체의 미켈란젤로 광장같이 화려한 야경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주변은 더 고요했고 전망대에는 나 포함 세네 명의 사람들만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완전히 어두워진 리스본에 잘 자라는 인사를 나지막하게 건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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