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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이의 눈으로 보는 세상

세상의 끝에 서다_신트라, 카보 다 호카

by 썸머Summer 2023. 7. 9.

오늘은 리스본 주변 지역인 신트라와 호카곶을 둘러 보기로 했다.

어제는 종일 흐린 날씨에 비도 가끔 왔었는데 오늘은 날씨가 정말 좋았다. 단지 쨍한 파란 하늘 하나에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는 점에서 사람이 생각보다 단순한 존재라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우울증 환자들이 날씨가 따뜻하고 맑은 곳으로 이사 가는 것이 약을 먹는 것보다 훨씬 증상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글을 읽어서 날씨에 흔들리는 약한 인간의 감정에 대해 생각하며 기분 좋게 역으로 향했다.

경전철 같은 느릿한 기차를 타고 먼저 도착한 곳은 신트라. 이곳에는 페나 성, 신트라 왕궁, 무어 성, 헤갈레이라 별장 등 유명한 관광지가 많이 있는데 시간 관계상 전부 다 가지 못해서 나는 그중에 '페나 성'만 방문하기로 했다. 페나 성에 도착하고 나서 나는 한 번 더 오늘 날씨에 쾌재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페나 성은 일반적인 여느 성들과 다르게 마치 롯데월드나 에버랜드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알록달록한 색깔이 인상적인 성이었다. 파란 하늘과 밝은 자연광 아래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페나 성의 색깔에 감탄하면서 연신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댔다. 또 셔틀버스를 타고 산길을 굽이굽이 올라간 만큼 높은 곳에 있는 페나 성 꼭대기에 올라가니 신트라 지역의 탁 트인 전경이 보이는데 내 기분도 시야만큼 한껏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페나 성 구경을 마치고 다시 신트라 역으로 돌아와서 신트라 역 앞에 있는 중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은 뒤 호카곶으로 향했다.

Cabo da Roca, 카보다호카, 또는 카보다로카. (H와 R 발음이 영어랑 다른 듯한 포르투갈어. 실제로 한국어로는 호시우 광장이라고 책에 표기된 곳도 실제 스펠링은 Rossio였다.) 예전에 포르투갈에 가면 ‘세상의 끝’을 만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바로 이 호카곶이 유럽의 가장 서쪽이라 '세상의 끝'이라고 불린다는 얘기를 들은 이후부터 넓고 넓은 세상, 그 세상의 끝에 서는 느낌은 어떤 느낌일지 너무 궁금했기 때문에 이곳을 방문하는 것은 나의 오랜 버킷리스트였다. 내 머릿속 세상 끝의 이미지는 바다와 맞닿은 절벽 끝의 위태로움과 귓가를 때리는 강한 바람 소리, 그리고 황량하고 쓸쓸한 분위기가 존재하는 곳인데 실제로도 그러할지 직접 느껴보고 싶었다.

하지만 사실 '세상의 끝'이라는 말이 당시 유럽사람들 입장에서의 세상의 끝이지 그들이 말한 세상 끝 너머에서 태어나고 살아온 나에겐 '세상의 끝'이라는 그 칭호가 조금은 오만하게도 느껴졌다. 그러나 당시 이곳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이곳을 지나 조금만 바다로 나가면 아득한 심연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지금 내가 지구는 당연히 둥글다고 믿는 것만큼 당연한 상식이었을 테니까 그 수식어를 조금 더 넓은 마음으로 포용하기로 하고 호카곶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가다 바다가 보일 때 쯤 심장이 세게 두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버스 정류장에 내려 조금만 걸어가니 눈앞에 바로 광활한 바다와 깎아지르는 절벽이 펼쳐졌다. 겨울에 방문해서 그런지 세찬 바람이 불었지만, 날씨는 맑아 바다는 파랗고 영롱하게 빛났다.

바닷소리, 바람 소리는 내가 상상한 세상의 끝의 모습과 비슷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빛나는 바다와 파란 하늘 그리고 푸른 초원 위에 서 있는 빨간 등대 덕분에 내 상상처럼 마냥 쓸쓸하고 황량한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바다와 맞닿아 있는 절벽에서 추락사고가 일어날 위험이 있으니 관광객들을 위해 걸터앉을 만한 높이의 담장이 쳐져 있었고 사람들이 그곳에 앉아 사진을 찍거나 하며 각자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엔 유럽의 가장 서쪽 끝인 이곳의 위도와 경도가 적힌 십자가 돌탑이 있었다. 그리고 이 탑엔 포르투갈의 시인 루이스 드 카몽이스의 시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AQUI...... ONDE A TERRA SE ACABA E O MAR COMECA…….

 

직역에 따르면 “여기 육지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라는 뜻을 가진 구절인데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모두가 이곳이 세상의 끝이라고 말하고 나도 그 끝에 서 보고 싶어서 찾아왔는데 시인은 이곳을 시작이라고 본 것이다. 한용운 시인의 ‘알 수 없어요’의 유명한 한 구절인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가 떠올랐다. 시인들은 통하는 게 있는 건가.

사실 ‘끝이 있으니 시작도 있다.’, ‘가장 어두울 때 새벽이 오는 법이다’와 같은 말들이 워낙 많이 쓰이다 보니 이제는 약간 죽은 표현처럼 느껴진다. 그렇지만 바다 쪽으로 걸터앉아, 내 등 뒤에서 아득한 동쪽에서부터 시작한 거대한 대륙이 끝나고, 내 앞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것을 바라보니 식상하게 느껴졌던 그 세상의 이치가 새롭게 느껴졌다.

삶을 살아가는 것은 무수한 가능성을 안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다. 자의든 타의든 한 세계가 끝났을 때 우리는 여지없이 새로운 세계를 향해 떠나갈 수밖에 없다. 각자의 행장을 꾸리고 설렘과 두려움을 안고 배에 올라타야 한다. 당장 어떤 풍랑을 맞을지 알 수 없고 아무리 내가 거센 비바람을 맞으며 노력한다고 해도 그 끝이 아름다운 과일나무가 주렁주렁 열린 땅일지 아니면 깊은 바닷속에 침몰할지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만 하는 것. 그러한 삶의 여정에서 나는 어떤 세계를 끝내고, 어떠한 항로를 선택해 나아가야 할까. 세상의 끝이라는 곳에서 새로운 시작에 대해 한참동안 앉아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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