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으로 돌아가는 편도 항공권을 끊었다. 원래 내가 영국에 머물 수 있었던 기간은 2018년 9월부터 2020년 7월까지였다. 그러나 출산일도 7월이라 출산일에 가깝게 비행기를 타는 것에 대한 부담 때문에 예정 날짜보다 약 2개월 빨리 돌아가는 표를 구매했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갈수록 나빠지기만 하는 유럽의 상황과 영국 총리가 얼마 전 발표한 herd immunity(집단 면역) 전략에 대한 걱정, 이곳에서는 제대로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불안함에 귀국 날짜를 한 달이나 훌쩍 앞당겨 3월 말에 돌아가게 되었다.
영국에 가는 것이 결정되고 떠날 준비를 하는 그 시간 동안 얼마나 설렜는지 모른다. 6년 차에 접어든 직장생활에 슬슬 지쳐갈 무렵 영국으로 훌쩍 떠난다는 사실은 나를 얼마나 기쁘게 했던지. 심지어 남편은 와서 열심히 학교 다니며 공부해야 했지만 나는 얽매일 것 하나 없는 자유의 몸 그 자체였다. 내가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먹고 싶을 때 먹는 이런 삶을 당분간은 가지지 못할 것이다.
영국에 처음 왔을 때 내게 특히 신선하게 다가왔던 것은 시차 감각이었다. 한국과 영국은 9시간의 시차가 있다. 즉 내가 영국에서 자고 있는 새벽 시간이 한국에서는 바쁘게 일과가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9월에 개학하는 남편의 영국 대학 일정에 맞춰 오다 보니 한국에서 내가 맡았던 학년을 다 마무리 짓지 못했다. 그래서 비록 몸은 떠나왔지만, 학년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담임으로서 내 책임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학년 부 단톡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랬더니 늘 내가 자고 있을 때 그 단톡방에서는 바쁘게 업무 상황이 오고 갔고, 나는 다음 날 잠에서 깬 뒤 모든 상황이 해결된 다음의 단톡방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 학교와 관련된 일이 정말 내 삶의 대부분을 차지했었고 그렇기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는데, 내가 그렇게 일에 치이며 살고 있을 때 세상 어딘가에서는 편안한 단잠을 자고 있었다는 사실이 주는 느낌이 참 미묘했다. 하루라도 조용히 넘어가기 어려웠던 학교생활이 그냥 아련한 꿈같이 느껴졌다. 꿈속의 일은 아무리 심각해도 잠에서 깨고나면 다 사라지는 것처럼 학교의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들도 다 이렇게 지나가고 마는 것을 왜 그렇게까지 힘들어하고 아파했는가 싶었다. 하지만 어쩌면 장자의 호접지몽처럼 반대로 이곳에서의 생활 전체가 꿈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영국에 와서 새롭고 즐거운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었다. 청강 수준의 어학 수업이었지만 외국인 교수님께 수업도 듣고, 다른 국적의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다. 체육관에서 다인종의 사람들과 어울려 다양한 GX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처음으로 영어 원서를 완독했다. 가족과 친구들을 영국 집에 초대해 함께 일상을 보내고 여행을 떠났으며 나 홀로 씩씩하게 해외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물론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충분히 주어진 시간만큼 많은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전공 공부를 하며 나를 채우고 싶었는데 나의 나태함으로 인해 처음 세웠던 목표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또 전염병으로 불안한 마음에 이곳저곳 추억이 남은 공간들에 제대로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한 채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 것도 정말 아쉽다. 아마 한국으로 돌아가 복직을 하면, 지금 이 순간들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는 점점 더 늘어갈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나를 다독여본다. 처음 이 책을 만들려고 했을 때는 매일 글쓰기에 도전했지만 역시 매일 글쓰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매일 글쓰기를 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에 내게 이런 한 권의 책이나마 남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많은 경험과 감정이 뒤섞인 1년 6개월의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다. 심지어 새 가족이 찾아올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영국과 한국 사이 9시간의 아릿한 시차는 영원히 내게 아로새겨져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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