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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밤의 꿈같은

로맨스가 필요해

by 썸머Summer 2020. 2. 17.

 

며칠 전이 밸런타인데이라 남편과 함께 애프터눈티를 즐기고 왔다. ‘영국’ 하면 유명한 것 중 하나가 애프터눈티라서 영국에 오기 전부터 한 번쯤은 해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언제든지 마음을 먹으면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아직 하지 못했었다. 그렇지만 이제 곧 한국으로 돌아갈 때도 되었고 밸런타인데이를 로맨틱하게 보내고 싶어 지인이 추천해 준 곳으로 예약을 했다. 

예전에 홍콩 페닌슐라 호텔에서 애프터눈티를 먹었을 땐 3단 트레이에 샌드위치, 스콘 및 달콤한 디저트들이 담겨 나왔는데 이곳은 코스요리처럼 나오는 것이 특이했다. 드라이아이스로 기분 좋은 효과를 낸 코코넛 크림 브륄레를 시작으로 2단 트레이에 예쁘게 올려진 한입 크기의 샌드위치, 마카롱, 밀푀유, 타르트 등이 각자의 맛을 뽐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금 갓 구워 따끈한 스콘까지. 난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차를 마셨는데 차에 약간의 바닐라 향이 가미되어 있어서 그런지 우유를 섞어 밀크티로 마셨을 때 고소하고 부드러운 밀크티의 맛이 더욱 잘 느껴졌다.

‘비밀의 화원’, ‘작은 아씨들’, ‘빨간 머리 앤’ 등을 ‘세계 명작 동화’ 버전으로 보고 자라서  동화 속 아가씨들의 ‘티 타임’을 재현해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이렇게 어릴적부터 소꿉놀이로만 흉내 내던 것을 남편과 함께 분위기를 즐기며 우아하게 보낼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다. 그리고 남편이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인용해 정성스럽게 써 준 손편지까지 더할 나위 없이 로맨틱한 시간이었다.

나는 올해로 결혼한 지 5년 차이다. 그동안 아이가 없이 둘만 지내다 보니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소위 신혼 생활을 길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아이를 낳은 이후 나와 남편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이번에도 밸런타인데이를 챙기는 남편과 달리 주변의 아이가 있는 집 남편들은 밸런타인데이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물론 그분들이 집에서는 잘하는데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부라는 것은 참 묘한 관계인 것 같다. 평생 남으로 살던 두 사람이 만나 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관계적으로도 너무나 급전개가 아닌가. 1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한 사람들도 ‘지인’ 혹은 ‘동료’에서 ‘친구’, ‘가장 친한 친구’ 정도의 관계적인 발전을 하는데 부부는 몇 년(연애는 10년 넘게는 잘 안 하니까) 심지어는 몇 달 만에 ‘남’에서 ‘가족’으로 바뀌다니.

그래서 나와 남편의 관계 속엔 ‘남’과 ‘가족’ 사이의 다양한 관계의 스펙트럼이 다 들어있다. 사랑을 나누는 ‘연인’, 마음이 통하는 ‘친구’, 어려움도 함께 헤쳐나가는 ‘전우’, 조건 없이 지지를 해주는 ‘가족’, 어쩔 땐 “당신 누구세요”라고 하고 싶을 정도의 그저 지나가는 사람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나는 이런 다양한 관계의 양상 속에서 ‘연인’이라는 관계는 끝까지 놓치고 싶지 않다. ‘연인’이라는 관계만큼은 다른 어떤 사람과도 대체할 수 없는 부부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로맨스가 필요하다. 결혼기념일, 생일, 크리스마스, 밸런타인데이와 같은 특별한 날에는 적당한 분위기와 이벤트가 있어야 하고 평범한 날에도 서로 사랑한다는 표현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상도에서 장녀로 나고 자라 낯간지러운 표현이나 분위기를 잘 견디지 못하는 나지만, 그래도 표현은 할수록 늘고 표현하지 않으면 상대는 궁예가 아닌 이상 내 마음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늘 노력하려고 한다.
 
많은 기혼자 선배들처럼 나도 아이를 낳고서는 정신없는 육아 속에 로맨스는 일단 뒷전이 될까. 그렇지만 적어도 농담으로라도 ‘가족끼리 징그럽게 왜 이래’ 하는 그런 사이는 되고 싶지 않다. 남편과는 평생 꽃과 선물을 주고받으며 분위기 있는 음악에 와인 한 잔을 곁들여 서로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그런 사이로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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