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인생의 시간 대부분을 어떤 ‘오빠’의 팬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보냈다. 나의 사적, 사회적 정체성은 다양한 학년 군의 학생에서 직장인으로 이리저리 바뀌었지만 어떤 ‘오빠’의 팬이라는 정체성은 변함이 없었다. 물론 여기서 ‘오빠’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바뀌었다. 지금은 ‘생물학적’으로 오빠인 경우에서 잘생긴 사람에게 부여된다는 ‘사회적 지위’로서의 오빠로 바뀌긴 했지만, 누군가를 응원하는 서포터즈, 팬, 덕후, 빠순이인 나 자신은 그대로였다. 이상하게 나는 그렇게 많은 오빠를 갈아 치우면서도 배우나 솔로 가수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오직 그룹으로 활동하는 아이돌들만이 스크린 속 나의 오빠가 되었다.
아이돌을 좋아하는 것이 내겐 습관이자 관성이자 라이프스타일이 되어버려서 그런지 가족, 친구, 연인이 주는 위안과 애정과는 또 다른 감정을 아이돌에게 느껴 왔다. 10대 때부터 지금까지 인생의 큰 고비를 만났을 때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채워주지 못하는 어떤 공간을 아이돌은 쉽게 채워주었다. 그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힘이 나기도 하고 그들의 멋진 무대를 보면 잠시나마 힘든 것들이 잊히기도 했다. 또 그들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는 그 모습이 내게 동기부여가 되어 나 자신을 스스로 다독이고 응원할 수도 있었다.
약 3년 전부터 나의 스크린 속 ‘오빠’(사회적 지위로서의 의미)는 방탄소년단이다. 당장 시험 문제 출제를 해야 하는데 너무 하기 싫어서 인터넷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방탄소년단의 무대를 보게 되었다. 그렇게 며칠을 홀린 듯이 유튜브 파도타기를 하다 보니 다음 날 출근을 해야 함에도 꼬박 밤을 새우기까지 했다. 그 뒤엔 앨범도 차근차근 사 모으고 콘서트도 한국에서 한 번, 영국에서 두 번을 다녀오며 지금도 즐겁게 그들을 좋아하고 있다.
특히 이번 임신 초기기간엔 방탄소년단에게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입덧도 너무 심하고 바깥에도 잘 나갈 수가 없어서 집 안에서 굉장히 괴로웠는데, 그 괴로움을 유일하게 달래준 것이 바로 방탄소년단의 자체 콘텐츠 ‘본 보야지’였다. 이 콘텐츠는 여행 리얼리티 예능으로 방탄소년단이 여행지(이번 시즌4의 경우 뉴질랜드)로 떠나 그곳에서 여행하며 일어나는 에피소드들을 약 8주간에 걸쳐 보여주는 콘텐츠이다. 이 8주라는 기간이 어쩌다 보니 딱 내 입덧이 시작될 때쯤부터 해서 입덧이 거의 끝나갈 때까지였다. 저번 글에도 썼듯이 너무 괴로운 시간의 연속이었는데 일주일에 유일하게 이 영상을 볼 때만큼은 입덧도 잊어버릴 정도로 행복했다. 그리고 내 심한 입덧 기간과 작년 연말이 겹쳤었는데, 각 방송사에서 진행되는 시상식에 방탄소년단이 꼬박꼬박 나와 멋진 무대를 보여주는 것을 보며 또 잠시나마 육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정말 이것만큼은 옆에서 물심양면으로 날 돌봐주는 남편도, 떨어져 있지만 꼬박꼬박 영상통화를 하며 걱정해주는 가족도 도와줄 수 없었던 부분이었다.
나도 사실 내가 이날 이때까지 스크린 속 ‘오빠’들에게 열광할 줄은 몰랐다. 10대 때는 어련히 나이가 들면 안 하겠지 싶었지만 그렇지 않았고 결혼도 아마 출산도 내 마음을 막지는 않을 것 같다. 말했듯 스크린 속의 그들과 나누는 감정은 나의 다양한 감정의 일부가 되었고 내 애정의 다양한 형태 중 하나가 되었다.
그렇지만 요즘 들어 이 마음을 지속하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오랫동안 스크린 속 ‘오빠들’을 좋아해 왔기 때문에, 그들이 스크린 바깥에서 얼마나 병들어 가고 있는지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안다. 작년 한해에만 귀한 집 귀한 딸 두명이 세상을 등졌다. 화려한 케이팝의 업적만 주목할 뿐 그 이면을 무시한 채로 이 산업이 굴러간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지만 무시하고 있을 뿐이다. 아이돌의 꿈을 저당잡고 부리는 소속사들의 횡포나 악성 댓글로부터 보호 장치 하나 없는 아이돌들의 소통창구, 스크린 속 오빠들이 빛나도록 도와주는 스태프들의 열악한 처우까지 바꾸려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을 텐데 오늘도 케이팝 산업은 그저 사람들을 갈아 넣어 돌아간다.
이런 시점에 내가 즐겁고 행복하다고, 내가 위로를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눈과 귀를 닫은 채 스크린 속 오빠들에게 애정을 쏟고 소비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이 자꾸 느껴진다. 나도 이 비인간적인 시스템을 공고히 하는 것에 일조하는 공범이 된 것 같다.
나도, 그리고 나를 위로해 준 스크린 속 ‘오빠’들도 모두 행복해지도록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고민이 깊어져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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