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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밤의 꿈같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에 대한 생각

by 썸머Summer 2020. 1. 30.


전염병은 공포다. 우리 주변에 늘 존재하지만, 그 존재를 잊고 살던 우리에게 죽음을 상기시키는 공포다. 게다가 아직 백신마저 찾지 못했다고 하면 죽음의 그림자가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공포다. 다른 어떤 것도 아니고 그냥 학교에 가고 일터에 가고 사람들을 만났을 뿐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타액을 통해, 공기를 통해 죽음의 신의 칼날이 나를 향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 없이 두렵다. 

내가 기억하는 범위 내에서도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여러 번의 신종 전염병의 유행이 있었다.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 그런데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와 그 전의 병은 내게 느낌이 아주 다르다. 그동안은 그냥 손 잘 씻고, 마스크 철저히 쓰는 등으로 개인위생에만 철저하면 뭐 큰일이 있겠냐 싶었다. 워낙 언론에서 떠들어대니 조금 무섭긴 하지만 그래도 적어도 나는 조심만 한다면 그런 병에 걸리지 않을 거라는 알 수 없는 태평한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은 내게 이제까지와는 다른 온도로 느껴진다.

우선 내가 현재 임산부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상투적으로 느꼈던 ‘노약자는 더욱 특히 유의하세요’라는 이 문구가 다르게 다가온다. 정말 조심해야겠다는 마음과 동시에 다른 때보다 더욱 생생한 두려움이 느껴진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웬만하면 집 밖으로 나가고 싶지도 않다. 

그리고 또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이라는 지금까지 겪지 못했던 나의 현 상황이 이 바이러스를 둘러싼 상황에 대해 다양한 시각을 갖게 해줬다. 그동안은 '한국에 사는 한국인'이라는 동질 집단 속 일원으로서의 시각만 가졌다. 타인, 특히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타인의 침범은 곧 죽음으로 이어지기에 그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 중국인에 대한 배척을 넘어 혐오감정까지 느끼는 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그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우한에 살던 교민들이 대거 입국하여 내 집 앞에 있는 시설에 격리된다고 하면 아무리 철저한 관리를 한다고 위에서 떠들어도 당장 느끼는 불안감을 잠재우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도시에서 바이러스가 발생했다면 어떨까.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온 것뿐인데 우리나라에서 내가 오는 것이 싫어서 트랙터까지 끌고 나와 항의를 한다면? 배척과 혐오의 주체로서의 ‘나’는 이해할 수 있다고 합리화해놓고 막상 내가 그 대상이 된다면 그때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리고 실제로 난 이곳에서 배척의 대상이 되어 가고 있다. 아직 영국은 발병자가 없어서 그런 시선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진 않는다. 그러나 프랑스나 독일처럼 발병자가 생긴 나라에 사는 교민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최근 대중교통이나 길거리에서 기침하거나 하면 자신을 쳐다보는 시각이 매섭게 변했다고 한다. 당연한 듯 내게 ‘니하오’라고 말을 거는 서양인들에게 중국인이든 한국인이든 매한가지로 보일 뿐이다. 아시아인의 모습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자기들만큼이나 우한과는 1도 관련 없는 사람들에 대해 거부감을 느낀다. 

오늘 홍대 앞에서 중국인과 한국인 간의 폭행 시비가 붙었다는 뉴스를 봤다. 이런 물리적 충돌이 아니라도 인터넷 댓글만 봐도 인종차별을 넘어 제노사이드를 암시하는 무시무시한 글들이 너무 많다. 각종 가짜뉴스와 선동이 판치면서 이성적인 사고가 공포에 잠식되어 가는 것이 눈에 보인다. 한국사 시간에 관동 대지진이 일어난 후 일본인들이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를 내세워 조선인을 학살했다는 역사를 배우며 어떻게 인간들이 그럴 수 있나 싶었다. 그런데 내 생각보다 인간은 너무나 연약한 존재인 것 같다. 공포 앞에서 우리는 너무나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내가 사는 도시에도 중국인들이 굉장히 많이 산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만 내 안에서도 자꾸만 배척과 혐오의 감정이 샘솟는다. 이번 설에 중국이라도 다녀온 것은 아닐까 싶어 접촉을 피하게 되고,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면 나도 모르게 숨을 참게 된다. 오히려 저들 중에선 중국에 가본 적도 없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을 텐데도 말이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죽음 앞에 공포를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우며, 나와 다른 것을 쳐내는 것은 너무 간단하다. 하지만 이런 감정을 흘러가는 대로 두는 순간 어떤 비극이 벌어졌는지를 우리는 수없이 반복된 역사 속에서 배워 왔다. 현재 나는 누구보다 더 조심해야 하는 ‘노약자’ 속에 속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비이성적인 혐오의 감정에 잠식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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