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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마트에 가다

썸머Summer 2019. 9. 28. 03:35

 

 

Chertsey에 있는 캠핑장에서 1박 2일 캠핑을 한 뒤, 이곳이 뉴몰든과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어 뉴몰든에 들렀다. 

뉴몰든은 런던 근처(남서쪽?)에 있는 지역으로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고, 영국에서 한국식 중식당(?!)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식당인 '징기스칸'이라는 맛집이 있는 곳이라고 들었다. 

(한국식 중식당이라는 것도 참 이상한데 가게 이름이 몽골사람인 징기스칸인 것까지 뭔가 기묘하다 기묘해ㅋㅋㅋㅋ) 

런던과 뉴몰든도 상당히 거리가 있고 내가 살고 있는 곳과도 상당히 거리가 있어서 이야기만 들었지 오지 못했는데 이 기회에 한번 들러보자는 생각으로 뉴몰든에 들렀다. 들러서 맛있게 짬짜면과 탕수육을 슈룹슈룹 먹고 근처에 H마트가 있다고 해서 들러보았다.

 

난 H마트가 미국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영국에도 있었다니 8ㅅ8

내가 사는 지역에 있는 한인마트는 되게 조그만데 여긴 진짜 마트 규모여서 깜짝 놀랐다. 진짜 뉴몰든 살면 밥 해먹고 사는 것에 대해서 불편함 1도 없겠더라. 한국마트에 있을 법한 물건들은 생물(신선육이나 신선한 생선..)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있는 것 같았다. 필요한 생활용품까지도.  한국제품이 다수이나 그 외의 아시아 국가의 식재료들도 많이 파는 것 같았다. 나도 온 김에 내가 사는 곳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냉동토막갈치와 냉동쭈꾸미 그리고 사골육수를 샀다. 계산대 앞에 달려있는 TV에서는 한국아이돌들의 뮤직비디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H마트에 간 기념으로 (?) 내가 뉴요커에서 감명깊게 읽었던 에세이 한 편을 소개하고 싶다. 

https://www.newyorker.com/culture/culture-desk/crying-in-h-mart

 

Crying in H Mart _ The New Yorker          By Michelle Zauner     August 20, 2018

"H마트에서 울다"라는 글인데 H마트라는 단순한 한인마트가 어떤 사람들에게 이렇게도 다가올 수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쓴이처럼 외국에 살며 엄마의 흔적 조각을 찾지는 않겠지만, 언젠가 우리 엄마가 나를 떠났을 때 나도 이 작가처럼 어디선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엄마의 흔적을 찾으며 눈물을 흘릴 것 같다. 영어 에세이를 읽으며 운 적은 처음이라 소개하고픈 마음에 번역해보았다. 완전 의역 오역 투성이지만 그냥 이 글이 좋아서.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로, 나는 H마트에서 울었다.

H마트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명하자면, 그곳은 아시안 식재료에 특화된 슈퍼마켓 체인점이다. 'H(ㅎ)'는 '한아름'할 때 H(ㅎ)이다. 이 말은 대충 번역하자면 '식재료를 한 가득 안고간다'는 한국어 표현이다.

H마트는 parachute kids(유학/이민 온 외국인 아이들?)이 집을 생각나게 해주는 바로 그 라면을 사러 가는 곳이다. 그곳은 한국인 가족들이 새해에 먹는 ‘떡국’이라는 소고기 스프를 요리하기 위해 떡을 사는 곳이기도 하다. H 마트는 유일하게 깐 마늘을 큰 통으로 파는 곳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그곳은 유일하게 한국인들이 먹는 음식에 얼마나 많은 양의 마늘이 필요한지를 알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H 마트에서는 일반적인 식료품 가게에서 "세계음식"(ethnic food)코너가 단 한 줄을 작게 차지 하는 것과 달리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H마트에서는 Goya콩을 느닷없이 스리라차 소스 옆에 진열하지 않는다. 

 

대신 당신은 내가 ‘반찬’ 냉장고 옆에서 우리 엄마의 계란장조림의 맛과 동치미의 맛을 떠올리거나 냉동 코너에서 만두피를 들고 엄마와 내가 부엌 테이블에서 얇은 만두피 속에 다진 고기와 부추를 넣으며 만두를 만들었던 시간을 생각하며 울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건어물 옆에서 흐느끼며 내 자신에게 물어본다. “만약 우리가 주로 사던 미역이 어떤 상표의 미역이었는지 전화해서 물어볼 사람이 내 인생에 한 명도 남지 않았다면 내가 진짜 한국인이긴 한 걸까?”

 

내가 백인 아버지와 한국인 엄마 사이에서 자랄 때, 엄마는 내가 한국적인 것에 접근할 수 있는 연결다리였다. 엄마는 내게 실제로 한식을 요리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 적이 없지만(한국인들은 요리할 때 정확한 양을 알려주기보다 “엄마 맛이 날 때까지 참기름을 부어라”처럼 수수께끼 같은 지시사항을 알려주는 경향이 있다.) 엄마는 확실히 내가 한국식의 취향을(입맛을) 가지도록 키웠다. 이러한 한식에 대한 취향은 바로 좋은 음식에 대한 지나친 감상과 감정적인 식사를 의미했다. (This meant an over-the-top appreciation of good food and emotional eating 좋은 음식과 식사에 대해 되게 깐깐해졌다..? 이렇게 받아들여야 하나) 

 

우리는 모든 요리에 대해 까다로웠다. 김치는 알맞게 새콤해야 했고, 삼겹살은 알맞게 바삭해야 했다. 뜨거운 음식은 몹시 뜨겁게 내어져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먹을 수가 없었다. '한 주를 위한 식사 준비'라는 개념은 우리의 생활방식에 대한 터무니없는 모욕이었다. 우리는 그날그날 먹고 싶은 것을 먹었다. 만약 우리가 3주 동안 똑같은 김치찌개가 먹고 싶으면 우리는 그 김치찌개가 질릴 때까지 먹었다. 우리는 계절이나 명절에 따라 해 먹기도 했다. 내 생일에는 엄마가 미역국을 만들어줬다. 미역국은 생일날 엄마들을 축하해주기 위한 전통적인 음식이고 일반적으로 출산 후 여자들이 먹는 음식이기도 하다. 봄이 와서 날씨가 따뜻해지면 우리는 캠핑용 난로를 가지고 바깥으로 놀러 가 삼겹살을 구워 먹기도 했다. 여러 면에서 음식은 우리 엄마가 엄마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엄마가 아무리 내게 비판적이거나 무자비하게 굴어도 -나를 엄마가 느끼기에 가장 최고 버전의 모습인 나로 만들려고 꾸준히 몰아붙여도- 난 언제나 엄마가 나를 위해 싸준 점심 도시락이나 내가 좋아하는 반찬 위주로 준비해 준 식사에서 엄마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난 거의 한국말을 할 줄 모른다. 그러나 H 마트에서만큼은 내가 한국말을 유창하게 쓰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H 마트에 있는 참외, 단무지 등을 좋아해서 그 단어들을 크게 말하곤 한다. 나는 광택이 나는 봉지에 낯익은 만화가 그려진 과자들로 내 쇼핑 카트를 가득 채운다나는 엄마가 나한테 죠리퐁 봉지 속에 들어있는 작은 플라스틱 카드를 어떻게 접는지 그리고 그걸 카라멜 맛이 나는 폭신한 쌀과자를 떠먹는 숟가락으로 어떻게 이용하는지 그리고 아무리 숟가락을 이용한다 하더라도 죠리퐁은 내 셔츠와 차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줬던 날을 떠올리면서 엄마가 어릴 적에 먹었다는 과자와 내가 내 나잇대의 엄마를 상상하려고 노력했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엄마를 완전히 담아내기 위해(이해하기 위해) 엄마가 하는 모든 것들을 좋아하고 싶었다.

 

내 슬픔은 파도처럼 밀려오고 또 주로 뭔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촉발된다. 나는 당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우리 엄마의 머리카락이 욕조에 떨어지는 것을 지켜볼 때 어땠는지, 또는 약 5주 동안 병원에서 엄마를 간호하며 숙식했던 것에 대해 얘기해 줄 수 있다. 그렇지만 H 마트에서 어떤 꼬마가 두 주먹에 뻥튀기 봉지를 쥐고 달려올 때( but catch me at H Mart when some kid runs up double-fisting plastic sleeves of ppeong-twigi) 난 그냥 무너져 내렸다. 그 작은 쌀로 만든 프리스비는 내 어린 시절 그 자체이다. 엄마가 있고 방과 후 엄마와 내가 스티로폼 같은 느낌의 원반 과자를 같이 바삭바삭 먹었던, 더 행복했던 그 시절. 뻥튀기를 먹는 것은 설탕처럼 혀에서 녹아내리는 포장된 땅콩을 쪼개는 것과 같았다.

 

나는 한 한국인 할머니가 해물 라면을 푸드코트에서 먹으며 새우 머리나 홍합 껍데기 같은 것을 딸의 양은 밥공기 뚜껑에다 버리는 것을 볼 때 울게 될 것이다. 그녀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은 곱슬곱슬하고 광대뼈는 두 개의 복숭아 꼭대기처럼 튀어나왔고 반영구 문신이 된 눈썹은 잉크가 바래져 가고 있다. 나는 우리 엄마가 70대가 되었다면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하다. 우리 엄마도 모든 한국인 할머니들이 마치 우리 인종 진화의 한 형태인 것 마냥 하고 있는 그 꼬불꼬불한 파마를 똑같이 했을까. 나는 엄마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푸드코트로 올라갈 때, 함께 팔짱을 끼고 내 몸에 기대어 있는 엄마의 작은 몸에 대해 상상해본다. 우리는 둘 다 엄마가 말하던 소위 뉴욕 스타일의 올 블랙 차림일 것이다. 엄마한테 뉴욕에 대한 이미지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시대에 머물러 있었다. 엄마는 엄마가 이태원 뒷골목에서 샀던 짜가 샤넬 지갑 대신 평생 갖고 싶어 하던 진짜 샤넬 퀼팅 가죽 지갑을 들고 있을 것이다. 엄마의 손과 얼굴은 QVC 안티 에이징 크림으로 살짝 끈적거릴 것이다. 엄마는 또 내가 싫어할 만한 약간 이상한 울트라-하이-탑 웻지 운동화 따위를 신고 있을 것 같다. “Michelle, 한국에서는 모든 연예인이 이런 걸 신거든”이라고  말하면서. 엄마는 내 코트에서 보풀을 뽑으면서 얼마나 내 어깨가 처졌는지, 얼마나 내가 새 신발이 필요한지, 얼른 엄마가 사준 아르간 오일 트리트먼트로 관리해야 한다며 말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상상속에서 어쨌든 우리는 함께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화가 많이 난다. 난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이 나이든 한국 여자에게 화가 난다. 단지 이 여자는 살 수 있고 우리 엄마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에서 마치 낯선 타인의 생존이 우리 엄마를 상실한 나의 경험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화가 난다. 왜 이 여자는 여기서 매운 짬뽕을 먹고 있는데 우리 엄마는 그럴 수 없는 건지. 다른 사람들도 분명 이런 식으로 느낄 것이다. 인생은 불공평하고 그런 불공평함에 대해 가끔 비이성적으로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이 약간은 도움이 된다.

 

종종 내 슬픔은 마치 내가 문이 없는 방에 홀로 남겨진 듯한 느낌이다.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내가 마치 절대 무너지지 않을 벽에 계속해 부딪히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탈출구는 없다. 단지 내가 계속해서 부딪히는 단단한 벽이 있을 뿐. 그 벽은 내가 절대로 엄마를 다시 볼 수 없다는 변하지 않는 현실만을 일깨워 준다.

 

H 마트는 보통 도시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내가 브루클린에 살 때 H 마트는 한 시간 정도 운전을 해야 하는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필라델피아에서도 거의 비슷했다. H 마트는 종종 더 큰 아시아 상점들 복합단지의 중심에 있으면서 아시안 식당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그 식당들은 마을 가까운 곳에 있는 식당들보다 언제나 더 맛있었다. 난 지금 작은 멸치, 속을 채운 오이, 그리고 절인 모든 음식 등 스무 접시 이상의 반찬으로 식탁을 가득 채워서 끝나지 않는 평행 젠가 게임을 하도록 만드는 바로 그 한식당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당신 직장 근처에 있는, 비빔밥에 단고추(bell pepper)가 올라가 있고 콩나물무침을 좀 더 달라고 할 때 종업원이 막 흘겨보는 그런 한심한(sad) 아시안 퓨전 식당과는 다르다. 이 식당들은 찐이다. (ㅋㅋ)

 

H 마트를 갈 때 당신은 아마 당신이 제대로 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엔 당신이 가는 길을 알려주는 표지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제대로 된 길을 따라가고 있다면 간판에 있는 글자들이 천천히 당신이 읽을 수도 혹은 읽지 못하는 글자들로 바뀔 것이다. 여기가 나의 초등학교 수준의 한국어 능력이 시험에 드는 단계이다. 신호에 걸려 있는 동안 나는 내가 얼마나 빠르게 그 글자(모음)를 소리 내 읽을 수 있는지 시험해본다.

난 거의 10년 넘게 매주 금요일 한글 학교에 다녔고, (그 결과) 난 각기 다른 아시아 글자로 적힌 교회 간판과 안경점, 은행의 간판을 읽는 것이 가능하다. (I spent more than ten years going to hangul hakkyo every Friday, and this is all I have to show for it: I can read the signs for churches in different Asian texts, for an optometrist’s office, a bank. 뭐라고 번역할지 약 잘 모르겠음;;) 그리고 몇 블록만 더 가면 바로 중심에 들어설 수 있다. 갑자기 다른 나라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모든 사람이 아시아인이고 서로 다른 방언들이 마치 보이지 않는 전화선처럼 교차하고 영어 단어는 오직 “HOT POT”“LIQUORS”에만 쓰인다. 그리고 그 영어 단어들은 애니메이션 호랑이나 그 옆에서 춤추는 핫도그들과 함께 다른 글자들 아래에 묻혀있다.(and they’re all buried beneath a handful of different characters, with an anime tiger or hot dog dancing next to them.)

 

H 마트 복합센터에는 푸드코트, 가전제품 가게 그리고 약국이 있다. 또 그곳엔 주로 화장품 가게가 있는데 거기에선 한국 메이크업 제품과 달팽이크림, 캐비어 오일이나 태반 마스크팩("태반"이라니 되게 있어보이지만 모호한 느낌의 광고다. 도대체 누구의 태반인지 누가알겠어)같은 스킨케어 제품을 살 수 있다. 또 거기엔 주로 부드러운 커피와 버블티 그리고 언제나 맛보다는 모양이 더 좋은 빛나는 빵들이 늘어선 프렌치 베이커리st의 빵집이 있다. 

 

나는 주말이면 점심을 먹으러 그곳까지 운전을 해서 간 뒤 일주일 동안 먹을 식료품들을 사고 돌아와서 신선한 재료를 갖고 뭐든지 생각나는 대로 저녁을 해 먹는다. Cheltenham에 있는 H 마트는 2층인데 식료품 가게는 1층에 있고 푸드코트는 2층에 있다. 2층에는 다양한 종류의 식당들이 늘어서 있다. 하나는 초밥 가게, 또 하나는 정통 중식당, 다른 식당은 한국식 전통 찌개를 파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돌솥이라고 불리는 전통적인 돌 냄비에 보글보글 끓는 국을 내어주는데 그 냄비는 미니 가마솥의 역할을 해서 10분이 지나도 여전히 국이 보글보글 끓도록 해준다. 그리고 그곳엔 한국식 길거리 음식을 파는 가게가 있는데 그곳에서는 한국식 라면(그저 신라면에 계란을 깨서 올려준 것이지만), 돼지고기와 당면이 두껍고 케이크 같은 반죽에 꽉 차 있는 왕만두, 쫀득쫀득하고 한입 사이즈의 원통형 떡을 어묵과 고추, 고추장(달콤하면서도 매운 맛의 소스로 대부분의 한식에 꽤나 많이 사용하는 세 가지 마더소스[cf.고추장,된장,간장] 중 하나)과 함께 끓인 떡볶이 등을 판다.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게가 있는데 한식과 중식 퓨전 식당으로 탕수육이라는 윤기나고 새콤달콤한 돼지고기 요리와 해물 라면(아마 짬뽕?),볶음밥, 짜장면을 파는 식당이다.

 

그 푸드코트는 사람들이 짜고 기름진 짜장면을 흡입하는 것을 관찰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이다. 나는 한국에 살던 친척들(지금은 대부분 돌아가셨지만)을 떠올린다. 나와 엄마가 14시간 가량 비행을 해 서울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먹었던 음식은 바로 한국식 중국 음식이었다. 이모가 전화로 주문한 뒤 20분 쯤 지나면 엘리제를 위하여의 음악 소리가 아파트 벨소리로 울리고 오토바이에서 갓 내린 헬멧을 쓴 남자가 큰 철가방을 들고 들어온다. 그는 철가방을 밀어서 열고는 수북히 담긴 면요리와 잘 튀겨진 돼지고기 요리를 풍부한 소스와 함께 배달한다. 씌워진 랩(사란랩)은 오목하고 물기가 맺혀있다. 우리는 랩을 벗겨내어 까맣고 건더기가 가득찬 소스를 면 위에 붓고, 빛나고 끈적끈적하며 반투명한 오렌지 소스를 돼지고기 위에 붓는다. 우리는 시원한 대리석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후루룩 소리를 내며 먹으며 서로의 요리에 손을 뻗는다. 우리 이모와 엄마와 외할머니는 한국어로 재잘재잘 얘기하고 나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해하기 힘들어, 통역을 해달라고 엄마를 귀찮게 굴면서 음식을 먹었다.

 

나는 H 마트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가족들을 그리워할지 궁금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푸드코트의 각기 다른 가게에 쟁반을 반납하면서 그들의 가족들을 생각하고 있을까. 이 사람들이 음식을 통해서 가족과의 유대감을 느끼거나 가족들을 기념하기(기리기)위해 먹고 있는걸까. 이 사람들 중 누군가는 올해에 집(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겠지. 어떤 사람은 지난 10년 동안 못갔겠지. 이 사람들 중 누군가는 나처럼 평생 떠나버린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는걸까.

 

한 테이블엔 가족들 없이 혼자 미국에 와 유학하고 있는 젊은 중국 학생들이 모여 앉아있다. 그들은 아마 만두국 하나를 먹기 위해 함께 도심을 벗어나 이국땅의 교외까지 45분 가량 버스를 타고 왔을 것이다.  

다른 테이블엔 할머니, 엄마, 딸로 보이는 한국 여자들이 각기 다른 찌개를 먹고 있다. 그들은 서로의 돌솥에 숟가락을 담그고 얼굴 앞에 팔을 들이대며 다른 사람의 쟁반 위로 손을 뻗어 젓가락으로 그들의 각기 다른 반찬을 집어 먹는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퍼스널 스페이스'(개인적 공간)라는 개념에 대해 개의치 않아 한다. 

 

또 그곳엔 젊은 백인 남자와 그의 가족들이 있다. 그들은 메뉴에 적힌 음식들의 발음을 엉망으로 읽으면서 깔깔거린다. 그 아들이 그의 부모님에게 그들이 시킨 각기 다른 음식들에 대해 설명해준다. 아마 그는 서울에 주둔한 미군이었거나 해외(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쳤을 것이다. 아마 저 가족들 중에서 그가 유일하게 여권을 가진 사람일지도 모른다. 아마 이 순간 저 가족들은 이젠 스스로 여행을 떠나 이런 새로운 음식들을 직접 발견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있을 수도 있다. 

 

다른 테이블에선 한 동양인 남자가 그의 여자친구에게 맛과 질감의 완전 새로운 세계를 소개하며 그의 여자친구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고 있다. 그는 여자친구에게 식초와 겨자를 먼저 넣으면 더욱 맛있는 차가운 면 요리인 물냉면을 먹는 법을 보여준다. 그는 여자친구에게 그의 부모님들이 어떻게 이 나라에 오게 되었는지, 그의 어머니가 어떻게 냉면을 요리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의 어머니가 냉면 요리를 할 때, 그의 어머니는 애호박 대신에 무를 사용한다는 이야기 같은. 한 노인이 주문을 하기 위해 옆 테이블 쪽으로 절뚝거리며 걸어간다. 그 노인은 아마 그가 매일 이곳에서 먹는 듯한 삼계탕을 주문한다. 진동벨이 울리고 사람들이 주문한 요리를 받으러 간다. 위생 캡(그 플라스틱 모양 위생 마스크)을 쓴 여자들이 카운터 뒤에서 쉬지 않고 일한다. 

 

그곳은 아름답고 신성한 장소이다. 그 푸드코트는 각기 다른 역사를 가진, 고향을 떠난,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로 가득차 있다.  그들은 모두 어디서 온 걸까. 그리고 얼마나 멀리서 왔을까. 왜 다들 H마트에 있는걸까. 그들의 아버지가 좋아했던 인도네시아 카레를 만드는데 필요한, 그러나 미국 슈퍼마켓에는 없는 galangal(*향료)을 찾기 위해 온 것일까. 그들이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을 기리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필요한 떡을 사기 위해 온 것일까. 비오는 날의 떡볶이가 너무 먹고싶은 그 마음을 채우기 위해 온 것일까. 인천의 한 포장마차 텐트 아래서 술에 취한 채 야식을 먹었던 기억에 의해 오게 된 걸까.

 

우린 그 이유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 절대 아는 체하지 않는다.(There’s never so much as a knowing look) 대신 우리는 여기 조용히 앉아서 점심을 먹는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모두 똑같은 이유를 가지고 여기에 왔다는 것을 안다. 우린 모두 이곳에서 우리 고향(집)이나 우리 자신의 한 조각을 찾고 있다. 우린 그 한 조각의 맛을, 우리가 주문한 음식과 우리가 구입한 재료들에서 찾는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향한다. 우리는 쇼핑한 것들을 들고 기숙사나 교외에 있는 집의 부엌으로 가지고 돌아와 새로운 요리를 재창조 한다.  그리고 이 요리는 H 마트까지의 여정 없이는 만들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찾는 것들은 '트레이더 조'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H 마트는 당신이 냄새나는(아마 한식or재료의 그 특유의 냄새일듯..?)한 지붕 아래에서 당신과 같은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고, 당신이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무언가를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곳이다. 

 

H 마트 푸드코트에서 나는 우리 엄마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첫 장의 이야기를 찾으며 내 자신을 다시 한번 발견한다. 나는 오래된 급수대 옆에 있는 테이블에 앉은 한 한국인 엄마와 아들 옆에 앉아있다. 그 아들은 예의 바르게 카운터에서 은수저를 가지고 와 엄마와 자신 앞에 놓인 종이냅킨 위에 둔다. 아들은 볶음밥을 먹고 엄마는 소뼈로 만든 탕인 '설렁탕'을 먹고 있다. 그 아들은 20대 초반인게 틀림없지만 아들의 엄마는 아직도 그에게 우리 엄마가 늘 하던 것처럼 어떻게 먹는지에 대해 가르쳐 주고 있다. "양파를 소스에 찍어먹어라", "고추장 너무 많이 넣으면 짜니까 많이 넣지마라" "넌 왜 녹두를 안먹니?"  간혹 어떤 날엔 저런 끊임없는 잔소리가 날 짜증나게 하기도 했었다. 아 엄마! 제발 나 쫌 그냥 편하게 먹게 해줘!  그러나 대부분의 날엔 나는 그런 잔소리가 한국 아줌마들이 다정함을 표현하는 궁극의 방법이란 것을 알고 있었고, 난 그 사랑을 소중히 여겼다. 

 

그 아들의 엄마는 그녀의 숟가락에 있는 소고기 몇 점을 아들의 숟가락으로 건네 준다. 아들은 그냥 조용히 있을 뿐 피곤해 보이며 엄마에게 별 말을 하지 않는다. 난 당장 저 아들에게 가서 내가 얼마나 우리 엄마 그리워하고 있는지 말하고 싶어졌다. 또 너희 엄마에게 친절해야 한다고, 삶이란 것은 정말 부서지기 쉽고 너희 엄마는 언제라도 너를 떠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그리고 엄마에게 얼른 병원에 가서 작은 종양이 자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해보라 말을 하라고.

 

지난 5년 동안, 나는 우리 이모와 엄마를 모두 암으로 잃었다. 그래서 내가 H 마트에 갈 때는 단지 오징어나 1달러에 세다발인 대파를 사러 가는 것이 아니라 엄마와 이모와의 추억을 찾으러 간다. 나는 나라는 사람의 반을 이루고 있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엄마와 이모가 돌아가셨을 때 같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흔적을 찾으러 간다. 
H마트는 나를 괴롭히는 엄마의 암 치료로 인해 빠진 머리카락, 해골 같은 몸, 하이드로코돈이 몇 mg 투약됐는지 기록하기 따위의 기억으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해주는 다리이다. H 마트는 우리 엄마와 이모가 암 치료를 받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생각나게 해준다. '짱구'과자를 열 손가락에 끼워 꼼지락거리는, 나에게 한국포도를 먹을 때 어떻게 하면 알맹이만 쏙 빼먹고 씨를 뱉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던 아름답고 생기로 넘치던 엄마와 이모의 모습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