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이의 눈으로 보는 세상

그란카나리아에서

썸머Summer 2019. 9. 11. 22:38

 

평소 나는 한번 여행을 갔을 때 여러 도시를 방문하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숙소도 여러 번 옮기며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려고 하는 여행자이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는 최초로 단 한 번도 숙소를 옮기지 않고, 별다른 계획 없이 그저 수영하고 파라솔 그늘 밑에서 쉬기만 하는 그런 스타일의 여행을 했다.

 

내가 워낙 추위를 싫어하기도 하고 기나긴 겨울을 상당히 지겨워하기 때문에 그동안 이런 스타일의 여행을 여러 번 시도했었다. 하와이와 다낭이 바로 이러한 목적으로 여행을 떠난 장소였다. 그러나 하와이는 워낙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이다 보니 가볼 곳도 한가득, 할 것도 한가득, 게다가 눈 돌아가는 쇼핑센터까지. 일주일 정도의 여행으로 그 섬을 담기엔 너무 규모가 컸던 것 같다. 그리고 또 예상보다 훨씬 비싼 물가와 익숙하지 않은 팁 문화까지 겹쳐서 분명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지만 여유롭다라는 느낌은 덜했다. 그리고 다낭의 경우엔 평소에도 여행지 날씨 운이 그다지 따르지 않는 나이지만 다낭여행 때는 특히 더 운이 따라주지 않아서 날씨가 너무 좋지 않았다. 연일 비가 내리고 흐린 날씨에 파도는 사람을 집어삼킬 만큼 사나웠고, 기온은 수영장에 감히 들어갈 엄두가 안 날 만큼 추워서 내가 바란 이상적인 휴양은 아니었다.

 

2월의 그란카나리아도 이글이글 불타는 남국의 날씨까지는 아니었고 살짝 수영하기에는 물이 차갑다고 느낄 만한 늦여름~초가을 정도였지만 그동안 여러 번의 코디 실패로(하와이로 여행 갈 때 민소매 티셔츠, 핫팬츠, 해변에서 입는 원피스만 챙겨 갔다가 생각보다 쌀쌀한 날씨에 결국 H&M에서 기모 후드를 사 입었던 지난날이여) 아무리 더운 지역도 겨울에는 살짝 쌀쌀하다는 것을 배워서 이번에는 긴 바지와 겹쳐 입을 수 있는 남방과 카디건을 챙겨왔더니 옷차림은 완벽했다. 그리고 가장 잘했다고 생각한 것은 이동 없이 단 하나의 숙소에 아침과 저녁 식사를 모두 포함한 옵션으로 예약한 것이다. 은근 여행지에서 맛집을 엄선해 내는 것에는 꽤 많은 수고가 필요한데 그냥 이 중에 네가 좋아하는 것 하나는 있겠지 하는 뷔페로 모든 식사를 예약하니까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메뉴는 엄청 많지만 뭐 하나 제대로 맛있는 게 없다는 보통의 뷔페들과 다르게 진짜 모든 음식이 다 맛있어서 식사 시간이 너무나 행복했다.

 

스스로 생각해본 이번 여행의 키워드는 이완이었다. 꽉 움켜쥐고 있던 것을 놓아버릴 때의 즐거움이란. 물리적으로는 추위를 피하려고 나를 칭칭 감고 있던 두꺼운 옷을 벗어 던지고, 가장 최소한의 옷, 비키니만 쓱 걸치고 파라솔 아래 선베드에 누워있으니 내 몸이 굉장히 자유로워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한국에서는 유교걸, 몸뚱어리 흥선대원군인 나인지라 다른 사람들 보이기에 민망해서 래시가드를 꼭 입었는데 여기서는 나이 불문, 몸매 불문 그냥 다들 비키니 하나만 입으니 나도 덩달아 쿨한 척 비키니만 입었는데 어찌나 좋던지. 그리고 요즈음은 비교적 내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편하게 살고 있지만 그런데도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할 수밖에 없는 요리, 청소, 설거지, 빨래 등과 같은 반복되고 지루한 의무들에서 분리될 수 있어서 어떤 완전한 해방감을 맛볼 수 있었다. 마치 따사로운 햇볕 아래에서 초콜릿이 끈적하게 녹아가듯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들이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생각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는 거더라? 사색이라는 게 뭐였지? 세상을 삐딱하게 보며 아이러니한 농담은 어떻게 던지는 것이었지? 모든 것들이 남쪽 섬으로 불어오는 온화한 바람과 함께 날아 가버렸다.

 

태양, 바다, 수영장, 파라솔, 선베드, 음악, 맥주, 감자 칩……. 얼핏 완벽해 보이는 이 조합을 더욱 완벽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바로 책이다. 매년 출판사가 ‘000이 휴가 때 가져간 책과 같은 광고 문구를 낼 수밖에 없는 건 해변 또는 실외수영장은 책을 읽기에 아주 좋은 환경이기 때문인 것 같다. 편안한 옷차림과 독서에 적당한 온도, 조도는 물론이며 파도 소리, 첨벙첨벙 수영하는 소리,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편안한 백색소음이 되어 책 속에 나도 모르게 푹 빠져들게 되었다.

 

이번 여행에 함께한 책은 김영민 교수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와 이국종 교수의 <골든아워>였다. 두 책은 다루고 있는 내용도, 문체도 달랐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묘하게 겹치는 점이 있는 것 같았다. 무책임한 희망보다는 철저한 절망이 낫다는 생각과 허무한 기대감은 가지려고 하지 않는 태도가 모든 글의 기저에 있는 듯 했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고, 사명감과 같은 대의보다는 그저 생활인으로서 견디며 사는 그들이기에 그들의 말은 허황되고 공허하지 않고 진실하고 단단하게 느껴졌다. 특히 김영민 교수의 행복은 대개 잠시의 쾌감에 가까운 것이고 덧없는 것이므로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살기를 바란다는 말에 시선이 오랜 시간 머물렀다. 이번 여행에서 나도 그 사소한 근심을 맘껏 누려보았다. ‘아 맛있는게 너무 많네. 이렇게 많이 먹으면 완전 살찌겠다’, ‘이런 멋있는 장소에서 왜 이렇게 사진이 예쁘게 안 찍히지?’ 같은 사치스럽고도 사치스러운 근심들. 이런 근심 걱정만 하고 살 수는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어가고 수영장 근처를 머무는 알 수 없는 언어들과 잘게 부서지는 웃음의 파편들이 점점 잦아들었다. 나는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헛손질을 하며 이 시간을 붙잡고 싶었다.